언제부터인가, 우리 한국사회에서 상대를 심하게 비하시키는 말 가운데 하나가 ‘정치적’이라거나 또는 ‘정치인 같다’는 것이다. 또 좌중에서 누군가가 듣기 좋은 소리를 했을 때 ‘당신 그거 정치적 발언 아니냐’는 가시든 농담을 할 정도가 돼버렸다. 우리 생각해보자. 대놓고 어떤 사람이 ‘당신은 아주 정치적이다’라고 했거나 ‘당신의 지금 행동이 꼭 정치인 같다’고 했을 때 그냥 웃어넘길 기분이겠는가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속의 불손한 의도나 배경에 대해 퍽 언짢아 할 것이다. 이는 우리 한국사회가 오랜 세월을 정치 불신과 정치 혐오에 젖어있었던 증좌다.정치는 흩어진 것을 모으는 것, 갈라진 것을 뭉치게 하는 것으로 정치의 종합성, 통합성의 의미라고 했다. 또한 정치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는 국민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일진대 정의가 근본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국민의 최대 행복을 실현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정의실현이 정치의 진정한 목적이 돼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정의는 자신의 역할과 직분에 최대한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모든 정치이론과 학설은 우리의 정치현실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따져보자. 흩어져 있던 것들은 더 흩어지고, 갈라진 곳은 더욱 균열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정치의 종합성, 통합성 의미는 이제 자취조차 없어졌다. 또 위정자가 제 역할과 직분을 다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국민이 그리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럼에도 정치판은 저마다 ‘마이웨이’에 속도를 더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무리 정당의 존립목표가 정권 창출 및 재창출에 있고, 정치지도자의 최종적 가치가 역시 집권에 있는 것이라지만 그렇게 해서 들어선 정권이 옳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믿고 따라줄 통합된 국민의 힘이 없는데 누가 무슨 수로 제대로 된 정치를 해낼 것인가.벌써부터 차기 대권후보군에 떠올라 승천을 꿈꾸고 있는 잠룡들 수가 다섯 손가락을 꼽고 남는다. 이들 모두가 스스로 탁월하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자신이 대권만 잡게 되면 모든게 달라질 것이라는 국민적 기대를 주기 위해 애쓰는 방법들이 때로 눈물겨울(?) 지경이다.이쯤 되면 우리 국민은 진정한 리더십에 목이 말라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무한한 비전을 느끼면서 무진장 행복해해야 마땅할 노릇이다. 이치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우리 사회가 이토록 리더십 갈증을 느끼는가에 대해 심각히 생각하는 정치지도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고도의 정치 기술만을 선보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정말 이제 정치에 질려버려서 정치적이라는 말 표현까지를 아주 혐오하고 있는데도 말이다.이대로면 앞으로 ‘정치적’이라는 용어 자체는 곧 거짓말이나 말 바꾸기를 빗대는 대명사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이 땅의 정치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나라 정치세력이 더 때늦기 전에 자의적 환상에서 깨어나 닥쳐든 정치 위기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감할 수 있을지 부터가 관건일 것이다. 민심이 애타게 바라는 바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과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정의를 실천해가는 리더십일 것이다. 또 하나 집권세력이 명심해야 할 일은 이 땅의 수천년 역사가 ‘저항의 역사’로 점철돼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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