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간소하기 이를 데 없는 다비식(茶毘式:화장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중생들도 본받아야함을 절감하였다. “가장 간소한 장례를 하라”는 스님의 유언에 따라 빈소에는 과일이나 떡 한 조각 없었다. 각계에서 보낸 조화도 없었다.

운구도 간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스님의 평소 당부대로 입던 옷 그대로 염습했고 관(棺)도 없이 평상위에 가사를 덮은 채 였다. 조사나 만장도 없었고 사리도 수습하지 않았으며 탑도 세우지 않았다.

법정 스님의 간결한 장례식은 스님의 ‘무소유(無所有)’ 신념에 바탕 한다. 스님은 ‘산에는 꽃이 피네’ 수상집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富) 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무소유’에 따라 ‘불필요한 것’으로서 돈 들고 번거러운 장례식을 거부한 채 탐욕과 허명(虛名)으로 얼룩진 중생들에게 값진 교훈을 남겼다. 법정 스님은 평생 동안 법문과 글을 통해 ‘무소유’를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행동으로 옮겼다. 집필로 받은 원고료는 모두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학생들의 장학금이나 사회봉사를 위해 내놓았다. 평생 종단의 장 자리 직책도, 사찰의 주지도, 사회 조직체의 우두머리 자리도 맡지 않았다.

한 신도로부터 시주 받은 길상사(吉祥寺)에도 자신을 위한 방 하나 마련하지 않았다. 스님은 종단 주지 자리를 놓고 패싸움이 벌어지면 “가사 입은 도둑들이나 벌이는 짓”이라며 엄히 꾸짖었다. 법정 스님은 그 흔해빠진 사회 운동단체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거절하였다.

스님의 맑고 심오한 사색과 필력에 감복해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피해 강원도 산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화전민이 살던 오두막집을 개조해 홀로 기거하였다.

위선과 허명 그리고 이기심으로 가득 찬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불공들이고 글 쓰며 생활하였다. 특히 “가장 간소한 장례를 하라”는 유언에 따라 치른 스님의 장례는 일부 허위허명에 가득 찬 장례문화를 크게 반성케 한다.

근년 장례식은 병원 영안실에서 치른다. 많이 간소화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병원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일부 상주들의 전시벽과 허명허욕이 타들어가는 향 냄새와 함께 물씬 풍긴다.

돈 꽤나 만졌거나 힘 꽤나 썼던 가족 장례식장에 가면 으례 조화(弔花)들로 빼곡히 장식된다. 수십 개 또는 수백 개가 진열된다. 별의별 ‘장’자리 이름의 꼬리표를 붙인 조화들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넘치는 조화들은 저쪽 복도 입구까지 점령하며 거추장스럽게 도열된다. 상주들은 조화들을 되도록 많아 받아 세워둠으로써 가세(家勢)의 위력을 과시하려든다. 조화를 보낸 사람들 중에는 직 간접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응한 경우도 많다.

장례식장은 조화를 서로 더 많이 받아 진열하려는 조화전시 경쟁 터로 전락된다. 물론 상주의 입장에선 마지막 떠나는 망인을 위해 보다 많이 진열해놓고 싶은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법정 스님의 지적대로 “불필요한 것”으로서 조화를 보내는 쪽의 경제적 부담과 번거로움을 산다. 허세를 부리고 싶은 탐욕의 제물이 된 것이다.

조화 없는 조촐한 이웃 상가(喪家)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 마저 자아내게 한다. 법정 스님의 간소한 ‘무소유’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우리 중생들도 장례식에 조화받기를 거부하는 캠페인을 벌여야 함을 통감한다. 결혼식 때 축하 화환을 거부하듯이 장례 조화도 사양해야 한다. 조화는 장례식장에서 마련해준 하나나 둘로 족하다. 사회 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하기 바란다. 정부도 ‘조화 거부 캠페인’을 적극 벌여야 함을 권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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