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9월 12일 이명박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간의 조찬 간담회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피력했다. 이 대통령은 12명의 재벌 총수들에게 사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힘 있는 사람, 가진 쪽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힘 있는” 대기업인들이 양보하라는 당부였다. 이어 그는 “대기업 때문에 중소기업 안 되는 건 사실”이라며 전적으로 대기업 책임론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답사에 나선 이 회장은 중소기업 측에도 책임이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는 “대기업이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먼저 일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30년간 협력업체(중소기업)를 챙겨왔는데 협력업체 단가가 2, 3차로 복잡해지면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고 토로하였다. 중소기업들이 다단계로 하청을 주다보니 그들의 이윤마진이 줄어들며 어려워진다는 점을 환기시킨 대목이었다. “중소기업이 안 되는 건” 대기업 때문만은 아니고 중소기업 자체에도 책임이 있다는 반론이었다.

삼성측은 이 회장의 발언이 이 대통령을 화나게 할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삼성측은 즉각 이 회장의 말이 “전후 맥락을 보면 대통령의 뜻에 맞서자는 게 아니라 함께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이었다고 애써 해명하였다.

삼성측이 공손히 고개 숙이고 나선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이 회장이 15년 전 김영삼 대통령에게 맞섰다가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금융거래 실명제 실시를 비롯해 전반적인 개혁에 나섰다. 바로 그 무렵인 1995년 4월 13일 이건희 회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김 대통령의 개혁을 빗댔다. 이 회장은 “한국의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면서 “대통령의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행정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는 한 21세기에 우리가 앞서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 대통령이 개혁한다고 하지만 “4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공염불로 겉돌 수 밖에 없다는 반론이었다.

김 대통령은 화가 났다. 결과는 삼성에 대한 유형무형의 압박으로 뻗쳤다. 삼성은 추진하던 F5 전투기 국제공동개량사업에서 정부의 기술도입 승인을 받지 못해 위기에 처했고, 영광 원자력발전소의 5, 6호기 건설에도 응찰하지 못하였다. 이 회장은 그해 7월 22일 김 대통령 방미 때 대기업 총수로선 유일하게 수행하지 못하였다. 왕따 당한 것이다. 4개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써 정부와 삼성 관계는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이 회장이 “정치는 4류”라고 말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그의 바른 말은 김 대통령의 기분을 긁었다. 김 대통령은 “4류 정치”로는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이 회장의 지적이 대통령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하지만 김 대통령의 삼성에 대한 핍박은 옹졸한 처사였고 자신도 “4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노정시킨 것이었으며 기업인들을 길들이려는 압박이었다.

대기업 총수들은 대통령 앞에서 모두 용비어천가만 불러서는 안 된다. 옳은 말은 주저 없이 털어놓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세무조사가 두려워서인지 대통령 앞에 서면 유난히 작아진다. 어느 재벌 총수는 9·12 청와대 회동에서도 기업이란 “경영 합리화로 이익을 내야지, 협력업체를 두드려서 이익을 내서는 안 된다”며 대통령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하였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 앞에서 꿀 바른 말만 해서는 안 되고 쓴 말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정부와 기업이 서로 보완하며 성장하는 길이고 자유민주의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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