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교육계의 추한 비리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온다. 공정택 전 서울시 교육감에게는 인사청탁 명목으로 1억 원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징역 4년의 실형이 대법원에 의해 확정되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신임 교감에게서 유럽여행 명목으로 300만 원을 받더니 대뜸 “왜 300입니까. 500이지”라고 호통을 쳐 더 받아냈다고 한다. 울산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학생들이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모은 돈 일부를 교사와의 회식비 등으로 썼다가 들통이 났다. 서울에서는 교장 9명이 수학여행, 수련회, 현장학습 등 학교행사를 추진하면서 관광 버스와 숙박 업체들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기기도 하였다.

그들은 신선한 교육 현장을 더러운 돈 벌이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겉으론 점잖은 선생님인척 하면서도 속으론 돈 밖에 모르는 조폭과 다름없다. 양두구육(羊頭拘肉) 그 대로이다.

그러나 지난 2월 11일 서울의 한 신문에는 59년 전 추위에 떠는 중학생들을 위해 군인들이 호주머니를 털어 바친 휴먼 스토리가 보도돼 가슴을 뭉클케 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 주변에서 떠 도는 역겨운 교육계 비리와는 너무 대조적인 맑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6·25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2년 겨울 이었다. 중부전선에서 북한 및 중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미군 40사단 장병 1만5000명이 잠시 경기도 가평 지역에 머물렀다. 조지프 클렐런드 사단장은 순찰하던 중 가평중학교 학생 150여 명이 추운 날씨에 누더기 천막을 치고 공부하던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어린 것들의 학습열의와 혹한에 고생하는 모습을 그 대로 지나 칠 수가 없었다. 그는 부대로 돌아와 장병들에게 가평중 상황을 설명하고 교사 신축을 위한 성금 모금을 제의하였다. 1만5000여 사단 장병들은 흔쾌히 허락하였고 1인당 2달러 이상의 돈을 모았으며 공병대와 수송대도 투입하였다. 59년 전의 2달러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벽돌을 날랐다. 그 해 말 교실 10개와 강당 1개가 완공되었다.

40사단 장병들은 평생 들어보지도 못했던 남의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뛰어 든 외인부대 였다. 언제 적의 흉탄을 맞고 쓰러질지 모르는 사선(死線)의 군인들이었다. 전선 장병들로서 피부색깔 조차 다른 어린 아이들의 천막 교실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특히 클렐런드 사단장의 경우 부대를 지휘통솔하고 전략전술을 짜기에도 바쁜 몸으로 한가하게 학생들의 교실 신축을 고민해야 할 위치는 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클렐런드 장군은 학생들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외면할 수 없어 허리에 권총을 찬 채 삽을 들고 나서 학교 건물을 세웠다. 그의 헌신적인 인간애는 한국전쟁사에 기리 빛날 위대한 선행이며 결코 한국이 잊어서는 안 될 은혜이다.

가평 주민과 학생들은 학교의 교명을 클렐런드 장군의 이름을 따도록 하였다. 하지만 본인은 정중히 사양했다. 그 대신 그는 40사단의 첫 한국 전선 전사자인 케네스 카이사 하사의 이름을 제안하였고 ‘가이사 중학교’로 명명되었다. ‘가이사 중학교’는 후에 가평중학교와 가평고등학교로 나뉘었다. 퇴임한 클렐런드 사단장은 1987년 부인과 함께 가평을 다시 찾아 장학금을 전달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부인이 남편의 연금을 장학금으로 바쳤다. 부인이 타계한 뒤에는 40사단이 ‘카이사 성금함’을 만들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건물 한켠에서는 검은 돈 먹는 비리가 오늘도 저질러지고 있다. 부끄럽기 그지 없다. 클렐런드 장군의 숭고한 인간애와 교육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교육계 비리는 근절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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