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지난 5월 2일 현지 시각으로 새벽 1시가 조금 지나 파키스탄의 은신처 아보타바드에서 미국 특공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10년 추적 끝에 얻어 낸 쾌거였다.

오사마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흉악한 테러범이었다.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 미국대사관, 2000년 10월 예멘의 아덴 항구 미국 전함, 2001년 9월11일 미국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과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 2002년 10월 인도네시아 발리 나이트클럽, 2004년 3월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2005년 7월 영국 런던의 3개 지하철 역과 1대 버스 등의 테러를 주도하거나 관련되었다.

오사마는 1957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무하마드 빈 아와드 빈 라덴과 네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무하마드는 시리아에서 1931년 건너온 이민자 였고 그의 부인도 예멘 출신이었다. 오사마는 사우디어로 ‘젊은 사자’란 뜻이다.

오사마의 아버지 무하마드는 제다에서 메카로 가는 순례자들의 짐을 날라주는 짐꾼 이었으나 후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최대 건설업자로 성장하였다. 무하마드는 1950년대부터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우드 국왕과 그의 후계자 파이잘 국왕의 신뢰를 얻어 궁전 등 왕실 건축을 독점하면서 큰 돈을 벌어 억만장자가 되었다.

오사마는 아버지가 국왕과 절친한 덕에 사우디 왕자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오사마가 열살 되던 196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무하마드의 네 부인들 중 오사마의 생모만이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이 아니어서 그녀는 ‘노예’라고 불렸고, 오사마도 ‘노예 자식’이라며 왕따 당했다. 어린 나이에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심을 솟구치게 하였다.

오사마는 15세 때 말(馬)과 개인 마구간을 가질 정도로 부유했지만, 그의 형제들과는 달리 미국이나 유럽 여행을 하지 않았다. 서구 문명 저항아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반서구적인 이슬람에 심취하였고 17세에 결혼, 5 명의 아내를 두었다.

오사마는 제다에 있는 킹 압둘 아지트 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에서 그는 이슬람 과격단체인 ‘이슬람 브러더후드’를 접하게 되었고 반서방 과격 이슬람 신봉자인 압둘라 아잠 교수의 영향을 받았다. 아잠은 서방국가들이 지배하는 땅을 되찾기 위해서는 오직 “성전(聖戰:지하드)과 총 만이 필요하고 협상이나 회담 또는 대화는 필요치 않다”고 가르쳤다. 아잠의 급진주의는 오사마의 테러 사상으로 전수되었다.

오사마는 이미 대학 시절 소련 점령하의 아프가니스탄에 드나들며 물려받은 유산을 성전을 위해 썼다. 그는 아프가티스탄 해방 성전에 참여하더니 급기야 잔인무도한 알 카에다를 조직하여 무자비한 서방국가 테러에 나섰다.

그는 2001년 9·11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미국에 의해 “공적 1호”로 지목되었고 생포 또는 사살 대상으로 추적되었다. 9·11 테러 후 한 기자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오사마 빈 라덴 사살을 바라느냐고 질문하자, 부시는 “옛날 서부 개척 시절 지명 수배자 포스터에는 산채로 또는 죽인 채로”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환기시켰다. 오사마에 관한 한 생포하거나 죽이거나 잡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오사마는 끝내 사살되었다.

오사마는 억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따돌림 당하며 기존 체제 증오속에 살았다. 대학 시절 부터 급진과격분자로 변신했다.

그후 피를 먹고 살아가던 오사마의 인생 여정은 한 밤중 기습한 미국 특공대에 의해 처참하게 마감되었다. 세계는 박수를 보냈고 그의 참혹한 최후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반드시 치러야 했던 인과응보(因果應報)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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