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의 ‘혁명 선구자 겸 지도자’라고 호칭되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8월 21일 수도 트리폴리에서 반란군에 의해 축출됐다.

그는 하루 전 까지만 해도 반군들을 “쥐새끼들”이라며 일망타진을 장담했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반군에 쫓겨 ‘쥐새끼’처럼 도망치고 말았다. 1969년 9월 1일 쿠테타로 집권한지 42년만의 일이다. 올해 2월 15일 시민들이 ‘자유’를 절규하며 봉기하기 시작한지 187일만의 승리였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공군의 7500회에 걸친 폭격, 해상봉쇄, 카다피 자금 동결 등도 카다피 권력 종말에 큰 몫을 했다.

카다피는 집권 기간 형무소에서 1200명을 학살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하는 등 공포분위기 속에 권력기반을 다졌다. 1970~80년대에는 중동·아프리카의 반서방 투쟁 지도자로 자임하며 서방 국가들을 상대로 알 카에다 못지않는 잔혹한 테러를 자행했다.

카다피는 금년 수 천 명의 시위군중을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해 학살했고 자신은 끝까지 트리폴리에서 반군 섬멸을 지휘하겠다고 장담했었다. 많은 외교관들과 전문가들은 카다피가 최후의 일각까지 총 들고 반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반군이 트리폴리로 들이닥치자 비겁하게도 ‘쥐새끼’처럼 숨고 말았다.

독재자들은 카다피처럼 정적을 척살하는데는 잔혹하면서도 자신의 생명과 안전에는 비굴하리만큼 애착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2003년 미군의 이라크 침공 당시 최후까지 항전하겠다고 큰 소리쳤다. 하지만 미군이 바그다드로 쳐들어가자 그도 ‘쥐새끼’처럼 비좁은 땅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었다가 생포돼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독재자들은 남의 죽음에 대해선 단지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길 뿐이다. 소련의 요세프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명의 죽음은 단지 숫자에 불과 하다”고 했다. 북한 김정일도 수백만 명을 처형하고 굶겨 죽였으면서도 단지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지난 1월 튀니지의 제인 엘 아비디네 벤알리 독재자는 집권 20년만에 시위대에 의해 축출됐다. 이어 2월엔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독재자도 30년만에 쫓겨났다. 6월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독재자도 33년만에 반군의 포격으로 부상당한 뒤 치료차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이미 20여년 전에는 동유럽 공산국들의 독재자들이 모조리 축출됐다. 금년 들어 또 다시 중동-북아프리카에서 독재자 몰락의 도미노(줄지어 너머지기)가 일고 있다.

하지만 독재자 김정일만은 끄떡도 하지 않고 버틴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20만명의 정치범 수용소, 혹독한 감시와 통제, 공개 처형 등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인무도한 탄압과 공포정치에 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철저한 김정일 보호다.

그러나 김정일도 언젠가는 후세인, 벤알리, 무바라크, 살레, 카다피 등과 같이 처참한 종말을 피하지 못하리라 본다. 인류의 역사발전법칙을 상기할 때 더욱 그렇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그 빌헤름 헤겔은 그의 저서 ‘역사철학’에서 인류 역사 발전의 절대 목적은 자유정신의 확산에 있다고 했다. 자유를 억누르는 독재와 속박은 영원토록 지탱될 수 없다는데서 자유는 시간과 더불어 발전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1980년대의 동구와 금년의 중동-북아프리카 독재자들의 몰락 도미노도 역사발전법칙에 따른 것이다. 김정일 독재자도 자유정신 진화의 역사발전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언젠가는 저 음습한 북녘 땅에도 자유가 스며들 수밖에 없고 그러면 끝내 김정일 권력도 붕멸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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