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지난 40여년 한국 정치사 정계개편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맹과 단독강화를 반복하며 충청권 맹주로 군림했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총선 후 대형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는 주변 정치인들과 함께 ‘역사모임’을 만들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나설 태세다. 정치적 의미를 부담스러워하는 김 전 총재측의 입장과는 달리 이 모임은 사실상 그의 후원 모임으로 인식되고 있다. ‘정치 9단’, ‘합종과 연횡의 선수’라는 그의 수식어가 말해주듯 2007 대선이 임박한 시점, 다양한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등장하는 가운데 ‘원로 정치인’이라는 자리 보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란 정치권의 해석이다.

이른 바 ‘신 DJP 연대’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여권에 대한 호남의 이반 현상이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호남은 물론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고건 전 국무총리가 김 전 총재의 역할론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신 DJP 연대 시나리오에서 정리할 부분은 심대평 충남지사가 주도하고 있는 신당과 김 전 총재와의 관계다. 우선 중부권을 중심으로 한 신당 추진세력이 ‘창당’을 공식 선언한 가운데 김 전 총재가 정치활동을 재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그렇다고 신당이 자민련과 공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신당과 JP 뗄 수 없는 이유

17대 총선의 초라한 성적표, 그리고 자민련에 뿌리 깊이 남아있는 대외적인 이미지는 신당과 함께 할 수 없는 최대 약점이다. 이는 김 전 총재에 대한 평가와도 겹치는 부분이다. 지난 40여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줄다리기에서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며 충청권 맹주의 자리를 지켜왔던 그다. 이는 신당 추진세력이 김 전 총재를 비롯한 자민련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식 출범에 앞서 신당 추진세력은 자민련 소속 의원들을 향해 개별적인 참여는 있을 수 있지만, 합당에는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김 전 총재 및 자민련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그대로 정치권에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의구심의 원인은 신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는 구성원들에 있다. 대부분 김 전 총재의 측근 또는 핵심 브레인으로 활동했던 인사들이다. 또한 17대 총선 이후 심 지사 주변에서 신당 창당에 대한 설왕설래가 잦았음에도 김 전 총재는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보다 중요한 것은 김 전 총재 스스로 ‘정계은퇴’를 말하면서도, 미래를 담보로 한 역할론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10선 고지를 눈앞에 두고 정계를 은퇴한 김 전 총재가 과연 정계개편의 소용돌이 속에서 관망만 하고 있지 않을 것이란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또한 자민련 간판으로 민선 3기 충남지사에 성공한 심 지사와 김 전 총재의 다년간의 신뢰도 신당 창당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40여년간 충청권 평정

이러한 정황상 정치권 일각에선 지난 40여년간 충청권을 평정해온 김 전 총재가 신당에 관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 정치적 해석을 고려, 연기된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가칭)’에서도 김 전 총재의 의중이 감지된다는 것. 애초 모임의 결성이 알려지면서 그 설립배경과 성격 등을 둘러싼 정치적 해석이 이어졌던 게 사실이다. 전격 취소되긴 했으나 이 모임의 성격은 김 전 총재 개인을 위한 모임이라는 게 이미 밝혀지기도 했다. 또한 올해 안에 모임을 결성,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는 일정도 잡혀 있다. 모임에 참여하는 인사들의 면면 역시 지켜볼 대목이다. 대부분 김 전 총재와 함께 일선 정치에 나섰던 전·현직 국회의원들로서 조부영 전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80여명이 함께 할 것으로 전해진다.

현역 의원 가운데는 자민련 소속인 김학원 이인제 김낙성 의원, 무소속의 류근찬 정진석 의원 등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모두 자민련 출신 의원들이며 신당 참여가 예정된 이들도 있다. 특히 이 모임의 결성 배경이 지난 8월 공개된 1965년 당시 한일협정 문서라는 점에서 ‘김 전 총재의 신당 개입’ 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의 한일 청구권 협상 메모 공개에 따른 논란이 이어지면서 김 전 총재와 함께 정치를 했던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임 결성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지난 총선 이후 김 전 총재가 정치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데는 ‘낙선’외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었다. 정부가 추진해온 과거사 정리, 그 중 김 전 총재가 깊이 개입했던 ‘한일협정 문서’가 부담이 됐다는 것.

JP 등장 호기는 정계개편

신당 창당 이전 이 모임의 결성으로 과거사를 극복하려 하는 것 역시 김 전 총재의 정치 재개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총선 이후 정치권 일각에서는 적당한 시점, 김 전 총재가 전면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이어졌다. 물론 ‘정치 9단’으로서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계개편이 호기다. 게다가 대선 전이라는 작금의 상황은 정치재개를 준비하고 있는 김 전 총재에게 윤활유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모임이 결성돼 본격적으로 활동한다면 신당 창당과 맞물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연말 연초 정치권에 변수로 작용할 것이란 관측도 높다. 충청권 정치구도는 물론 2007 대선 지형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시각이다. 이는 신당에 대한 정치권의 해석과도 맥을 같이한다.

각 지역의 지분을 갖고 참여하는 분권화된 정당을 목표로 한다는 공식적인 명분 이면에는 궁극적으로 중부권 신당을 통해 충청권 맹주 자리를 되찾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사실상 김 전 총재와 선을 긋고 있으나, 차기 대통령감 1위를 달리고 있는 고건 전 총리에 대한 구애와 민주당과의 연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신당의 현 주소는, 김 전 총재의 어제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 한 인사는 “국민적 지지도와 달리 정당을 매개로 한 후보로 등장할 수 없는 비(非)현역 정치인, 고 전 총리의 약점도 김 전 총재라면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나봤다. 결국 충청권 지분을 확보한 이후 이른 바 ‘신 DJP 연대’를 통해 차기 대권 구도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모색할 것이란 관측이다. 물론 신당이 충청권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한다면 97년의 재연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연말, 김 전 총재의 정치활동 재개와 신당 창당이 본 궤도에 진입할 무렵이면 여야 차기 주자를 둘러싼 각 당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맞물려 신 DJP 연대에 쏠리는 관심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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