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전기획부 도청 X파일’, 불법 대선자금 관련 ‘삼성채권’ 수사가 마무리됐다.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라는 결론이다. 97년에 이어 2002년까지 이어지는 대선자금 시리즈는 지난주 아쉽게 막을 내렸지만,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된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은 ‘무혐의 처리’로 종결됐다. 그러나 검찰 주변과 정치권에선 여전히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도청 수사가 막바지에 이른 시점,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대미를 장식할 것으로 예상돼왔던 삼성채권 수사가 불거진 것과, 삼성이 깊숙이 개인된 두 사건을 매듭짓는 일련의 과정이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검찰의 ‘삼성 봐주기’ 의혹, 그 진위 여부를 추적해 봤다. ‘검찰과 삼성의 모종의 거래?’두 사건의 수사결과가 최종 발표된 지난주, 검찰 주변과 정치권에서 떠돌던 말이다. 두 사건을 바라보는 냉담한 시선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각본’에 따라 움직였나

삼성채권과 관련된 참고인들이 공소 시효가 지난 뒤 약속이나 한 듯 검찰 조사에 순순히 응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미리 준비된 각본에 따라 움직인, ‘짜맞추기’ 흔적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 첫 번째 징후가 나타난 시점은 지난 14일이다. 이날은 서울중앙지검의 도청 수사발표가 예정된 날이었다. 그런데 대검은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서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던 삼성채권 문제를 들고 나왔다. 사라진 삼성채권 6억 원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을 공개 소환한 것이다.2003년 수사 당시 삼성채권 800억 원의 매입경로와 사용처는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던 사건이다.

검찰은 당시 삼성 측에서 정치권에 제공한 채권 규모를 발표했다. 한나라당 300억원, 노무현 후보 캠프 15억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15억 4,000만 원이 알려진 사용처다. 그러나 나머지 500여억 원의 행방이 묘연해, 정치권은 검찰의 수사결과에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내사 중지 상태였던 삼성채권 수사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된 시점은 올 5월. 삼성의 채권을 사 준 삼성증권 전 직원 최모씨가 귀국한 것이다. 검찰은 중단했던 채권의 현금화 여부 조회를 재개했으며 9월 체포된 최씨를 통해 채권 번호를 추적, 수사에 박차를 가해왔다. 문제는 수사 결과에 따라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는 두 사건이 동시에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는 데 있다. 충격은 완화되고, 여론은 양분되기 마련이다.

“이광재 소환 몰랐다”

143일간의 안기부 ‘X파일’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는 이 의원의 소환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검찰은 97년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 공여에 대해 “당시 자금은 ‘이건희 회장의 개인 돈’이라는 삼성 측의 주장을 깰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X파일에 등장하는 ‘이건희-홍석현-이학수’ 등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검찰 자신이 관계된 삼성측의 검찰 고위 인사에 대한 떡값 제공 여부에 대해서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국민의 정부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을 구속하는 등 활발한 수사를 벌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사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성그룹과 이 회장에 대한 소환조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의원에 대한 공개 소환으로 안기부 X파일 수사결과 파장은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발표 시점부터 맥이 빠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이 다시 정치권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대선자금 수사가 진행되고 있던 2003년 12월 “대선 때 우리가 쓴 불법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계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노 대통령은 과거 발언이 아직도 유효한가”라고 논평했다. 의혹은 왜 이 의원을 공개 소환했는가에 모아진다. 정치권 한 인사는 “검찰은 8월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학수 김인주씨 등 삼성 임원과 정치권 인사들을 비밀리에 소환해 왔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뒤늦게 도청 수사결과 발표에 맞춰, 참고인 신분에 불과한 이 의원을 공개 소환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불법 대선자금 재연에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검찰은 교통정리에 나섰다. 15일, 한나라당에도 채권이 더 전달됐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검찰의 수사결과 여야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는 한나라당 847억9,000만 원(대선자금 수사 때는 823억2,000만 원), 노무현 캠프 119억6,200만 원(대선자금 수사 때는 113억6,200만 원)으로 늘어났다. 노무현 캠프의 불법자금 규모는 한나라당의 7분의 1 수준. 여야 ‘형평성’을 고려해 한나라당 부분을 밝힌 듯한 인상이 짙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자진해서 실토한 삼성 왜?

삼성그룹의 최근 행방도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다. 삼성은 최근 2002년 대선 당시 조성한 불법 대선자금의 규모 및 검찰이 찾고 있던 400억 원대의 채권까지 자진해서 제출했다. 대선자금 수사 때도 의연하게 대응했던 삼성이다. 삼성측은 그동안 “기업 경영의 보안사항”이라는 대응 논리를 유지해 왔으며, 검찰의 채권번호 제출 요구를 완강히 거부해 왔다. 때문에 자진 실토, 그 배경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검찰에 비밀리에 소환된 김인주 삼성 구조조정본부 사장은 그동안 숨겨왔던 불법 대선자금 제공 내역을 털어놨다.

지난 2002년 5월 노무현 후보 기획팀장이던 이광재 의원에게 무기명 채권으로 6억 원, 이회창 후보의 법률고문이던 서정우 변호사에게 역시 채권으로 24억 7,000만 원을 추가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김인주 사장은 이 의원의 소환에 앞서 지난 6일에는, 따로 보관하고 있던 채권 400억 원도 검찰에 제출했다. ‘상식 밖’이라는 여론이 나오는 이유다. 삼성은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3년)가 대부분 지나 ‘무혐의 처분 대상’에 들어가자 뒤늦게 협조 자세로 돌아섰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검찰 역시, 공개 소환한 뒤 이 의원에게 면죄부를 준 것도 석연치 않다.

삼성채권과 관련 핵심 참고인인 최씨는 이 의원이 채권을 받은 지 정확히 3년이 되는 지난 5월 귀국했으며, 9월 체포됐다. 정치권 일각에선 공소시효가 남은 시점, 검찰이 적극적으로 최씨를 조사했다면 이 의원의 처벌이 가능했던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은 지난 주 검찰이 내놓은 수사 결과 어디에도 사건의 핵심과 관련 사법처리된 인사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삼성 떡값 효과, 삼성 장학생 등 ‘삼성 봐주기’ 의혹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검찰, 이광재에 면죄부 준 진짜 이유?

검찰은 삼성채권 800억원 중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추가 제공된 채권을 찾아내고도 법리적 이유를 들어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의원의 개인적 유용이 발견되지 않는 한 정치자금법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 의원의 학교 후배인 C씨를 통해 현금화한 사실이 범죄수익은닉규제법(돈세탁방지법)에 저촉되는지 “검토는 해보겠다”며 추가 수사의 여지만 남겨뒀을 뿐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점은 김인주 사장이 뒤늦게 이 의원에게 제공된 채권 액수를 밝힌 시점이다. 김 사장은 지난 6일 자진해서 검찰에 실토했다. 당시는 삼성이 에버랜드 사건과 도청 수사로 인해 위기에 몰려 있을 때다. 이 의원을 끝까지 보호하려던 삼성이 검찰의 압박에 의해 채권을 제공한 사실을 실토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공소시효만료 등으로 추가 처벌 받지 않게 된 점을 확인한 후 ‘거래용’으로 이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뒤를 잇는다. 이 의원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소극적이었다는 데서도 강한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검찰은 C씨가 채권을 다룬 사실을 파악했으나, 그는 이미 올 1월 베트남으로 출국한 뒤였다. C씨는 지난 12일 귀국한 뒤 “대학 선배인 이 의원의 부탁으로 채권 6억원을 현금화해 4억5천만 원을 만들어줬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은 베트남에서 귀국한 C씨가 이 의원과 연락했는지 통화내역 조회도 해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법리적으로 이 의원이 현금화한 4억5천만 원을 노무현 캠프에 ‘공식’ 입금하지 않았다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죄를 적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검찰은 이 의원 진술을 토대로 “횡령죄 적용은 어렵다”고 ‘무혐의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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