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대통령의 귀환.’이달초 전국민의 이목이 독일월드컵 조추첨 행사에 쏠렸다. 2002 월드컵의 영광을 재연할 수 있을 것인지, ‘죽음의 조’에 편입되는 것은 아닌지, 밤잠을 설치고 조추첨 행사 생중계를 지켜봤던 이들도 많다. 그런데 수많은 축구명사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정치인이 있었으니, 바로 3년 전 이맘 때 ‘축구 대통령’을 꿈꿨던 정몽준 의원이다.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는 월드컵 분위기와 맞물려 정 의원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독일행에 앞서 홈페이지를 단장하는가 하면, 지방선거 출마자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각당 대표들과의 회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정치재개를 위한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정치권의 분석이 등장한 것도 이맘때다. 정치권 일각에선 한국 대표팀이 이번 월드컵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면 정 의원의 정치활동에 있어 ‘어게인 2002’의 감동을 재연할 수 있을 것이란 조심스런 관측도 나온다. 이와 동시에 정치권 안팎에서 정 의원을 주인공으로 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등장해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과 연출한 ‘후보단일화’, 그리고 막판 뒤집기로 인해 일약 정치적 오명을 뒤집어 쓴 정 의원은 지난 3년간 정중동의 움직임을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정 의원의 발걸음이 무척 분주해졌다.

꿈★은 계속된다

지난 11월 홈페이지를 새롭게 단장하는 것을 계기로 정치 보폭을 넓히고 있는 것. 먼저 정 의원의 홈페이지가 선거용 문구로 장식돼 있다는 게 이색적이다. 정 의원의 공식 홈페이지 제목은 ‘글로벌(global) MJ’이며, 제목 아래에는 ‘살기좋은 나라’와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슬로건이 있다. ‘꿈★은 계속 됩니다’라는 인사말도 인상 깊게 다가온다. 3년 전 이맘 때를 연상케 한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뿐이 아니다. 중진급 의원들이 2006년 광역단체장 출마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각당 대표들과의 오찬회동에도 적극적인 모습이다.

이 때부터 정 의원이 ‘정치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말이 정치권 주변을 맴돌았다. 또한 17대 국회 들어 처음으로 상임위 관련 정책토론회도 개최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한화갑 민주당 대표, 김학원 자민련 대표를 비롯해 여야 정치인이 대거 참석해 축하와 격려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발걸음이 빨라진 정 의원에 대한 정치권의 관측도 다양하다. 독일 월드컵을 계기로 다시 한번 2002년의 신화를 창조할 것이라는 추측, 유력한 차기주자 편에 서서 ‘킹메이커’로서 역할을 하고 ‘차차기’를 노릴 것이라는 추측, 마지막으로 무소속으로 차기 서울시장에 도전할 것이라는 세 가지 시나리오로 압축된다.

먼저, 첫 번째 시나리오. 정치권은 대선주자로서의 정 의원의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 민주당 국민참여경선을 치르고 대선 후보에 오른 노무현 후보를 위협했던 이가 바로 정 의원이라는 사실만으로, 다음 대선에서도 유효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재벌가의 오너임에도 보수적인 이미지와 거리가 멀고, 일정 정도의 대중적 인지도 확보, 게다가 월드컵 열풍의 재연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춘다면 차기도 넘볼 수 있다는 관측이다.

자성의 물꼬 ‘월드컵’

물론 정 의원의 대권 행보와 관련 정치권의 무게 중심은 두 번째 시나리오인 ‘차차기’에 쏠려 있다. 오는 2007년 대선에서 독자출마할 가능성이 낮다는 얘기다. 이유는 ‘국민정서’에 있다. 정 의원과 친분이 두터운 한 인사는 “정 의원이 근래에 들어 대외활동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막판에 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는지에 대해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지 못한 상태다”라고 진단했다. 차기 대선에서는 유력 후보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머물 것이며, 자성하는 모습을 각인시키는 작업에 주력할 것이라는 관측이다.자성의 물꼬는 ‘독일월드컵’이 터줄 것이라는 게 정 의원과 가까운 인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정 의원은 현재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비롯해 동아시아축구연맹 회장,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탁월한 성과(16강 또는 8강 진출)를 올린다면 2002년의 ‘정치적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인지도 제고’도 노릴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지난 2002년을 장식했던 ‘월드컵의 함성’,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대선정국’은 바로 정 의원 자신이 주인공이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차기를 노리는 여야 잠룡들 주변에서도 독일월드컵에 이은 ‘정몽준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계산도 나온다.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이는 이달초 열린 독일월드컵 조추첨 행사에서도 증명된 바다. 온국민의 관심은 독일 현지의 표정에 집중됐고, ‘축구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정 의원은 세계의 축구명사들과 함께 월드컵 무대를 누비고 있었다.

그 무렵, 울산 현대를 9년만에 K리그 정상에 올려놓은 김정남 감독의 라디오 인터뷰는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에 대해 “(대통령이 돼도) 잘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축구협회를 결성한지 약 70년 됐는데, 정몽준 회장이 10년 동안 이룩한 축구문화가 70년 동안 이룩한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정 의원은 51년생으로 올해 54세다. 차차기인 2012년에 나선다 해도 결코 많지 않은 나이다. 그러나 정 의원이 내년 서울시장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가능성은 위에서 언급한 시나리오에 견줘 가장 낮아 보인다. 일단 독일월드컵이 열리기 전 치러지는 지방선거에 나설 경우, 표로 이어지는 월드컵 시너지 효과를 포기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울시장 출마와 관련, 대중적 인지도에 있어 차기 서울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후보군에 뒤처지지 않는 정 의원이기에 차기 및 차차기를 담보로 한 ‘밀약 플랜’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중도보수-영남 지지층

정 의원의 행보와 맞물려 그와 관련된 ‘영입설’도 정치권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를 받아들이는 각당 대선 진영의 온도차가 심해 현실로 이어질지는 더 지켜볼 일이다. 일단 여권 핵심부에선 “차기 대선 판을 흔들려는 것 아니냐”에서부터, “영입이 가능하다”는 개방적 견해도 있어 주목된다. 사실, 제일 먼저 정 의원에 대한 영입설이 흘러나온 진원지는 바로 여권이다. 개헌론과 맞물려 노무현 대통령이 ‘책임총리제 카드’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정 의원은 1순위로 거론됐다. 실제로 정치권 주변에선 참여정부 출범 이후 정 의원이 여권 핵심인사로부터 두 차례 국무총리직을 권유받았다는 게 정설이다.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후보단일화와 공조파기까지의 과정에서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은 애증과 정치적 채권·채무라는 복잡한 관계로 발전, 총리직을 제안·고사했다는 결론이다.

그렇다 해도 2002년 대선정국, 국민 대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정 의원이 참여정부에 합류한다면, 자연스럽게 정계개편을 도모할 수 있는 정국반전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몽준 책임총리’는 참여정부 후반부까지 미완의 과제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는 정치권 일각의 관측도 있다. 더 나아가 정 의원이 책임총리직을 수락할 경우엔 여권의 대권 구도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는 곧 정 의원이 여권의 대권주자 반열에 오르는 것이며, ‘호남’ 과 ‘개혁세력’을 중심으로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여권 잠룡들의 입장에서 ‘중도보수’와 ‘영남’에 확실한 기반을 갖고 있는 정 의원과의 러닝메이트는 매력적인 대선 전략이기 때문이다.

# 정몽준 영입은 무슨…고도의 언론플레이

정몽준 의원의 차차기 승부수와 관련, 정치권 안팎에선 정 의원이 차기를 노리는 대선주자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지난 대선에서 후보단일화 효과가 검증됐다는 대선 전략과 맞물려, 지방선거 이후 개헌논의가 진행된다면 정·부통령제로의 권력구조 개편론이 부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단, 정치권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다. 사실 두 사람의 연대는 이미 지난 대선 전부터 흘러나왔던 시나리오다. 서울 장충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이들은 평소 서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당시 ‘제3 후보론’은 이들의 연대에 기름을 붓기도 했다.

특히 최근 들어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어 ‘박근혜-정몽준’ 연대는 가장 설득력 있는 구도로 비치고 있다. 박 대표는 지난 11월28일 정 의원이 주최한 지진 관련 토론회에 참석해 “정치와 경제, 체육계를 오가며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시는 정 의원이 지진 관련 토론회까지 연다는 얘기를 듣고 그 열정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해야할 일”이라며 축사 이상의 덕담을 쏟아낸 바 있다. 그런가하면 고건 전총리도 정치권의 관심 대상이다. 정치적 행보를 자제하고 있음에도 대중적 인지도에서 현역 잠룡들에 밀리지 않는 고 전총리지만 대권 레이스에 접어들 경우, 지역적(호남) 한계를 극복하고 영남표심과 개혁세력을 공략해야 함은 물론이다.

실제로 고 전 총리는 정치권에서 오고가는 개헌논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비교적 중립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정몽준 카드’도 검토대상에 올려놓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최근 정 의원과 식사를 하며 영입을 제안한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정 의원의 대권 플랜에 찬물을 끼얹어 주목을 끌고 있다. 한 대표는 “정 의원쪽에서 만찬을 제의해 와 수락했다”면서 “연대설은 정 의원쪽에서 언론에 흘리고 있는 것 같다”며 ‘한화갑-정몽준’ 연대설에 쐐기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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