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서 태어나 경기고·서울법대 졸업 등 엘리트 코스 밟으며 성장선친후광 업고 33세 나이에 정계 진출 … 주로 DJ계 비주류로 활동지난 대선때 선대위원장 맡은것이 현정권 실세 부상 계기경성비리 이어굿모닝 연루로 정치생명 ‘풍전등화’검찰이 민주당 정대철 대표에게 사전구속영장 청구라는 초강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집권 여당 대표에 대한 영장 청구는 정 대표가 처음이다. ‘굿모닝 게이트’를 수사중인 서울지검 특수2부(채동욱 부장검사)는 18일 3차 소환에 불응한 정 대표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로써 정 대표는 98년 경성비리 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사법처리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정 대표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선친의 지역구인 서울 중구를 물려받아 국회에 입성한 이후 5선 고지에 오른 중진이다.

정계 입문이후에는 DJ(김대중 전대통령)계의 비주류로서 정치력을 키워왔다. 96년 15대 총선때 낙마해 원외로 밀려나는 설움을 겪었지만 2000년 4·13 총선에서 승리해 재기에 성공했다. 또 DJ정권때는 비주류로 전전하다 지난 대선때 노무현 후보 선대위원장을 맡아 대선승리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현정부 실세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정 대표는 98년 경성비리 사건에 이어 이번 굿모닝게이트로 또다시 사법처리될 위기에 처함으로써 정치생명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서울이 고향인 정 대표는 경기고-서울대 법대·동 대학원을 졸업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정 대표는 어린시절부터 부모의 영향을 많아 받고 자랐다.

그의 부친은 외무장관과 8선 의원을 지낸 고 정일형 박사이고, 모친은 국내 첫 변호사로 오랫동안 여성운동을 펼쳐온 고 이태영 변호사다.특히 정 박사 내외는 김대중(DJ) 전대통령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다. 정 박사는 71년 대선후보로 출마한 DJ의 선대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이 변호사는 DJ 선거운동을 위해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직을 그만 두기도 했다.정 대표가 자신의 정치역정 과정에서 DJ에게 적잖게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동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DJ와 그의 부모와의 이러한 특별한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관측된다.

정 대표는 일제치하 말기였던 44년에 태어났다. 당시 그의 부친인 정 박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강연을 주선하고,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평양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어려운 가정살림과 옥바라지는 모친인 이 변호사 몫이었다.이 변호사는 삯바느질은 물론 옷감장사에 누비이불장사를 하면서 밤에는 선교사댁 지하 시멘트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지내야 했다. 정 대표는 이처럼 암울했던 시절에 산파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어느날 진통이 시작되자 보다못해 방을 열어준 어느 과부 할머니댁에서 산파는 커녕 가위마저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외숙모가 급한 김에 손으로 정 대표를 받았고, 탯줄도 외숙모가 입으로 끊었다고 한다.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정 대표는 서울 청운초등학교를 갓 들어간 해(50년)에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정 대표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그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이곳 부산에서 지냈다.

이후 다시 서울로 올라온 정 대표는 당시 최고의 수재들이 몰려 있는 경기중·고를 다녔다. 중·고시절 정 대표는 깡마르고 열심히 공부하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가 기계에 관심이 많아 중3때 아마추어 무선 HAM활동을 시작했던게 그의 가족이 지금까지 햄가족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서울대 법대 재학시절에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데모에 줄기차게 참여했다. 집안사정으로 잘 먹지 못하고 고시공부를 하다가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결핵을 앓고 병원에 누워있으면서도 데모조종자로 몰려 4번씩이나 정학을 당하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정 대표는 특히 이 시절을 부모님의 명성 때문에 최소한 부모의 명성에 부응하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극도로 짓누르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대학 졸업후 정 대표는 대학교수를 희망한 부모의 뜻에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올라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그러나 76년 3·1구국선언 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인생도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부모가 모두 실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령의 8선의원이었던 정 박사는 국회의원직을, 이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을 각각 박탈당했다.

격분한 정 대표는 급히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또 평탄한 교수의 길을 걷기를 바랐던 부모를 설득, 아버지를 대신해 서울 중구 보궐선거에 출마하게 된다.“정치인의 최후 심판은 법원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뽑아준 국민들이 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의정단상에서 쫓겨나신 제 아버님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아직 젊은 나를 꼭 당선시켜 주십시오.” 당시 보궐선거에 출마한 정 대표가 유권자들에게 던진 연설 내용이다.결국 정 대표는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이후 정 대표는 제10·13·14·16대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적 역량과 함께 대망론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정치적 시련도 적지 않았다. 5공시절에는 정치규제에 묶이기도 했고, 96년 총선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게 석패하는 설움도 겪었다. 98년에는 경성비리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고, 이 사건은 지금도 재판에 계류중이다.또 93년 DJ가 정계를 은퇴한 가운데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동교동계가 이기택 후보를 지원한 상황에서 당권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97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전당대회에서는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DJ의 아성에 도전 했으나 역시 큰 표차로 패했다. DJ에 대한 반기는 그에게 적잖은 시련을 안겨줬다. DJ정권 초기에 경성사건으로 구속되는 아픔을 시작으로 DJ정권 내내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하지만 정 대표는 이러한 시련을 인내하고 2000년 4·13총선에서 당선되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또 DJ정권 당시 겪었던 설움을 바탕으로 그는 한단계 성숙한 정치인으로 거듭난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이러한 설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정 대표가 경성사건에 연루돼 수감중일 때 노 대통령은 정 대표를 찾아와 “형님이나 저나 DJ가 별로 예뻐하지 않는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이 고생을 하는 것 아닙니까”라며 위로했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 노 대통령과 정 대표의 이러한 정치적 신뢰는 97년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김원기 김상현 김근태 의원 등과 함께 국민경선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정 대표를 지원했던 것. 두 사람의 이러한 믿음과 정치적 신뢰는 지난해 대선때도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노 대통령은 당시 정 대표에게 “형님밖에는 없다”며 선대위원장직을 제의했고, 정 대표는 노 대통령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 대표는 이후 선거업무를 총괄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노 대통령 당선을 위해 뛰었다. 정치권 관계자들이 노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정 대표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절치부심하며 재기를 노렸던 정 대표는 노 대통령 당선과 함께 정치적 입지가 크게 확대됐고, 한화갑 전대표의 사임으로 대표직을 승계받으면서 명실상부한 현정부 실세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 그는 또다시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그를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굿모닝 분양비리 사건. 굿모닝게이트에 연루된 의혹을 받아온 정 대표는 스스로 정치자금을 수수한 사실을 시인했다.검찰은 이러한 정 대표를 상대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해 놓은 상태다. 따라서 경성비리 사건이 아직 종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굿모닝게이트로 정 대표가 또다시 구속된다면 그의 정치생명은 거의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정치생명을 담보로 검찰과 힘겨운 버티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정 대표의 향후 정치행보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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