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고·서울법대 졸업후 언론계 투신 조선일보편집국장등 역임85년 정계 입문 정무수석·노동장관·서울시장 등 공직 두루 거쳐개혁파 탈당·대북 제2특검등 난제 산적 험로 예고<사진1>대표적인 원조보수주의자로 통하는 최병렬 의원이 한나라당 신임대표에 등극했다. 최 대표는 영남(경남 산청) 출신이지만 정치적 기반을 서울에 두고 있는 4선 의원이다.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내디딘 최 대표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에 이르기까지 25년간 언론계에 몸 담아 왔다. 85년 민정당 전국구로 정계에 입문한 이후에는 5공화국에서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청와대 정무수석, 문공부·공보처·노동부 장관, 서울시장 등 오랜 공직생활을 거치면서 업무능력을 인정 받았다. 97년과 지난해에는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실패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거대 야당 수장에 올랐지만 그의 앞길이 결코 순탄치 만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당내 개혁파 의원들의 탈당 움직임, 대북송금 제2특검법안, 경선후유증 등 만만치 않은 현안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최틀러’라는 애칭이 말해주듯이 강단있는 정치인이란 평을 받고 있는 최 대표가 경선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강력한 리더십’을 당내에 연착륙시킬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최병렬 대표는 지리산 천왕봉 밑자락인 경남 산청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빈농의 아들이었던 최 대표는 8세 때 고향 산골을 벗어나 진주로 전학, 진주중-부산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대학생활도 힘든건 마찬가지. 하지만 어려운 가정환경은 그를 강하고 배짱 두둑한 청년으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최 대표는 지금도 지리산 기슭에서 태어나 오늘에 이른 것을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맨해튼에 진출한 것’으로 비유하곤 한다. 최 대표는 대학 3학년때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어려운 살림을 혼자 헤쳐나가야 했던 그는 학생신분으로 한국일보 기자가 됐다.이후 최 대표는 25년간 언론계에 몸 담았다. 59년 신입기자로 출발해 80년 42살때 조선일보 편집국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냉철한 현실분석과 매서운 세상읽기로 필명을 떨쳤다. 김영삼전대통령의 ‘40대 기수론’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던 최 대표의 감각은 편집국장 시절에 빛을 더해 오늘날 조선일보 편집의 전형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0년대 초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이른바 ‘기사실명제’를 처음 실시해 신문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 군사정권 시절, 신군부의 보도지침으로 신문의 편집이 좌지우지될 때에도 그는 외압에 굴하지 않은 강단있는 언론인으로 통했다. ‘최틀러’라는 애칭은 언론사 재직시절 일에 대한 열의와 카리스마적인 추진력에 놀란 당시 후배기자들이 붙여준 것이다.


이처럼 언론계에서 필명을 날렸던 최 대표는 85년 25년간의 언론계 생활을 접고 정계에 진출한다.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던 것. 이후 최 대표는 5공에서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청와대 정무수석, 공보처·노동부 장관, 서울시장등 다양한 공직을 거치면서 업무능력을 인정받은 4선 중진의원으로 거듭났다.“비록 열흘을 하다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옳은 일이라 생각하면 추진해야 한다”는 말은 최 대표가 공직에 있을 때 자주 쓰던 말로 그가 어떤 자세로 공직에 임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문화공보부 장관시절엔 각종 문예진흥사업과 문화부 독립을 추진했고, 공보처 장관 때는 방송구조 개편을 주도했다.

또 정무수석 시절엔 전두환 전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는 일을 주도했고, 90년 노태우 정부 시절 노사관계가 극한대립으로 치달을 때는 노동장관으로 맹활약했다. ‘무노동 무임금’ ‘총액임금제’ 등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보여줬지만 이로 인해 노동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울산 현대차 불법 파업 땐 유화적인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표까지 제출하며 공권력 투입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건 때는 서울시장으로 긴급 투입돼 해결사 역할을 담당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후 서울시민에게 엄습한 불안과 공포를 해소시킬 적임자로 임명된 최 대표는 당시 여야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시장직을 수행한 8개월 동안 서울시의 각 구조물에 대한 점검과 보수는 물론 처음으로 ‘외국감리’를 도입했고, 직접 안전모를 쓰고 각종 시설현장을 직접 누비고 다니는 모습에 ‘안전시장’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또 ‘버스전용차선제’를 실시해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세무제도 전산화’가 도입된 것도 이때 일이다. 최 대표가 당시 서울시장 취임사에서 역설한 “찬장에서 접시를 닦다가 깨뜨리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접시가 깨질 것을 두려워해 먼지가 낀 접시를 그냥 놔두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소위 ‘접시론’은 아직까지 서울시 공무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최 대표가 이번 대표 경선에서 캐치프레이즈를 ‘단합과 개혁, 강력한 리더십’으로 내걸었던 것은 이러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에서 배어나는 강력한 리더십과 안정감을 당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전략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정치적 역경과 시련도 적지 않았다.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꼴찌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98년 민선 서울시장 선거때도 의원직을 버리고 도전했지만 역시 낙마했다.하지만 최 대표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계속 키워갔다. 그 결과 2000년 4월 전당대회에선 최다 득표로 부총재에 당선되기도 했다.또 지난해 대선후보 경선에선 ‘이회창 필패론’을 제기하며 이회창 전총재의 아성에 도전하기도 했다. 최 대표가 제기한 ‘이회창 필패론’은 한동안 그를 당내 비주류로 내몰리게 했고, 이번 경선 과정에서도 타 후보들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최 대표는 대표적인 보수주의자로 통하기도 한다. 그는 정계 입문이후 한번도 보수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이번 경선에서도 보수 이미지는 그의 발목을 붙잡았던 가장 큰 족쇄였다.

하지만 최 대표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수구 보수’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합리성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한 개혁적 보수주의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난관을 돌파했다.최 대표는 또 경선때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의 얼굴만 젊게 바꾸고 말로만 개혁을 주장한다고 저절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당을 뜯어고치고 우리 정치를 뜯어고치는 것이 변화와 개혁이고, 이를 제대로 하려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 점에서 나만큼 준비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는 자신감을 피력하며 정면 돌파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이처럼 갖가지 역경과 시련을 극복한 최 대표는 153명의 소속 국회의원을 거느린 거대한 제1 야당의 수장자리에 등극했다. 국회 원내 제1당 대표로서 국회와 행정부의 관계, 여야 관계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자리에 오른 것이다.따라서 최 대표는 경선 승리의 기쁨을 뒤로한채 당을 추스르고 안정시키는데 여념이 없다.

당장 당내 개혁파 의원들의 탈당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했고, ‘대북송금 제2 특검법안’ 처리를 놓고 여당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후보들간의 대립과 반목도 하루빨리 치유해야 한다. 서청원 김덕룡 강재섭 의원 등 중진들을 중심으로 한 당내 계보정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이들과의 관계 재설정 문제도 현안 과제다.여기에 자신의 정치적 운명은 물론 당의 존립 여부가 결정될 17대 총선이 10개월여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는 상황이다. 경선 과정에서도 최 대표는 “내년 총선에서 지면 정계를 떠나겠다”는 배수진을 친 상태다.무엇 하나 만만한게 없다. 하지만 최 대표는 “몇달 안으로 당을 확 바꾸겠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현안 문제를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대대적인 물갈이 공천과 선명한 보혁구도로 당 내외 도전을 돌파하겠다는게 최 대표의 기본 구상이다.최 대표가 자신의 구상과 계획대로 암초가 산적한 망망대해를 슬기롭게 헤쳐나갈수 있을지 그의 항해술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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