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박지원 전청와대비서실장83년 뉴욕한인회장으로 미국에 망명중이던 DJ와 첫 인연87년 대선때 DJ따라 귀국 정계 입문 … 대변인으로 ‘명성’DJ정부때 요직 섭렵 … 퇴임 후에도 DJ맨 자처“대북송금에 문제 있다면 전적으로 내책임”특검수사 앞서 밝히기도“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16일 ‘대북송금 의혹사건’을 수사중인 송두환 특검팀에 출두한 박지원 전청와대비서실장이 던진 말이다. 이날 오전 특검 사무실에 도착한 박 전실장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대통령 특사로 참가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특검 수사에 성실하고 당당하게 임하겠다”고 말했다.

박 전실장의 이같은 발언에는 특검 수사가 주군인 김대중(DJ) 전대통령에게까지 미칠수 있음을 우려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박 전실장을 상대로 현대상선 대출외압 의혹 및 대북송금과 남북정상회담 연관성 등을 집중 조사한 특검팀은 조만간 DJ의 조사 여부 및 방법 등을 결정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실장이 대북송금 핵뇌관으로 부상한 만큼 그의 진술 내용은 DJ의 사법처리 여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영원한 DJ맨’으로 통하는 박 전실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DJ의 핵심 측근이다. 박 전실장에 대한 DJ의 애정과 신임도 각별하다.

박 전실장이 DJ정권에서 청와대 대변인-문화관광부장관-정책기획수석-비서실장 등 핵심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는 사실에서 그에 대한 DJ의 각별한 신임을 엿볼 수 있다.박 전실장이 DJ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여년 전인 지난 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뉴욕한인회장과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장을 역임하는 등 미국 뉴욕에서 성공한 재미 사업가로 활동중이던 박 전실장은 사형선고에서 무기로 감형된 뒤 다시 형집행정지를 받고 미국에 망명중이던 DJ를 만나게 된다.박 전실장이 민주당 유재건·김경재 의원, 유종근 전 전북지사 등과 함께 대표적인 해외파 인사로 분류되고 있는 것도 미국 망명시절에 DJ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전남 진도 출생으로 DJ와 동향이라는 교감이 있어서인지 박 전실장은 당시 DJ를 극진하게 대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발 및 잡화 사업체인 ‘데일리 패션’이라는 탄탄한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었던 그는 DJ의 망명 생활및 미주내 인권문제연구소 운영에 상당한 재정적 뒷받침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헌신적인 도움으로 DJ의 마음을 산 박 전실장은 이후 DJ가 망명에서 돌아와 87년 대선을 준비하고 있을때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로 들어와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87년 고향인 전남 진도의 평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정치를 시작한 그는 14대 국회때 전국구로 국회에 입성, 줄곧 당 대변인을 맡으면서 정치적 감각과 역량을 키워나갔다. 92년부터 97년까지 구 민주당과 국민회의 대변인을 맡아 ‘최장수 대변인’이라는 진기록도 가지고 있다.

초선 의원으로서 제1야당 대변인에 발탁된 그는 타고난 재치와 순발력, 유머스러우면서도 촌철살인의 논평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빗대 ‘대쪽이 아니라 죽순’이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박찬종씨는 ‘틈만 있으면 새어나오는 연탄가스’ 등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또 민주당 분당후 민주당이 국민회의 총재인 DJ를 공격하자 ‘여당의 2중대론’으로 민주당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당시 여당을 향해 독설을 서슴지 않았던 만큼 당시 여권 인사들에게는 ‘얄미운 사람’으로 낙인 찍혔지만 DJ로부터는 더욱 신임은 얻는 계기가 됐다.박 전실장에 대한 DJ의 신임은 그가 97년 대선 승리이후 98년1월 대통령 당선자 대변인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한번 입증이 됐다.

이후 박 전실장은 청와대 대변인인 공보수석을 거쳐 99년 5월 문화관광부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박 전실장은 2000년 9월 한빛은행 부정대출 의혹사건에 휘말려 낙마했지만 6개월후인 2001년 3·26개각때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다시 복귀했다.정책기획수석 시절에는 당시 이상주 비서실장을 대신한 청와대 최대 실세로 부상해 ‘왕수석’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박 전실장의 이러한 기세는 또다시 민주당 쇄신파동에 휩쓸리게 된다.2001년 11월 복귀 7개월 만에 “비서는 입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또다시 청와대를 떠난 박 전실장은 80여일 후인 2002년1월 대통령 정책특보로 재입성에 성공, 청와대비서실장으로 DJ가 퇴임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이처럼 ‘오뚝이’ 같은 정치적 부침을 거듭한 박 전실장은 지금까지 각종 구설수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98년 신동아그룹 옷로비 사건과 관련한 구설수를 시작으로 보광그룹 세무조사 사건, 한빛은행 대출사건, 대북송금 의혹사건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각종 구설수 중심에 그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한 당시 박 전실장의 역할과 임무는 특검 수사의 핵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실제로 문광부장관시절인 2000년 3, 4월 박 전실장은 북측과 중국 상하이, 베이징 등에서 연쇄 비밀접촉을 통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도출해 낸 주역이었다.또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간 화해·협력시대가 개막되자 대북정국에 발빠르게 대처하기도 했다. 2000년 8월 언론사 사장단과 함께 방북해 60여명의 언론사 사장 대표단이 보는 앞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구상과 결단을 이끌어 냈고, 김 위원장으로부터 사실상 세번째 방북 초청장을 받아내기도 했다.

당시 김 위원장은 박 전실장에게 이미자 조용필씨 등 남측 대중가수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때 방북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한편 정치권에선 당시 박 전실장이 방북 기간에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등 북한 당국자들과 개별회담을 가졌던 것과 관련해 갖가지 해석이 나돌기도 했다. 두 정상 사이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과 또다른 비밀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돌았다.박 전실장이 대북관계에 깊숙히 관여했다는 여러 정황들이다. 대북송금 특검팀도 바로 이러한 박 전실장의 역할과 임무에 주목하고 있다.하지만 박 전실장은 16일 특검사무실에 출두하면서 대북송금 등과 관련해 “모든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며 특검 수사가 DJ에게 튀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또 “6·15 남북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은 전 세계가 지지했으며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며 “햇볕정책이 없었다면 국민들이 그 많은 위기에 민생에 전념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한편 특검팀은 박 전실장에 대한 조사를 통해 DJ의 대북송금 인지여부 등이 규명되면 대북송금의 실체적 진실과 사법처리 수위를 결정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온 몸을 던져 DJ가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되도록 보필할 것”이라는 말을 평소 입버릇처럼 강조해 온 박 전실장. 대북송금 특검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자신과 자신의 주군인 DJ를 어떻게 방어할지 그의 결단과 향후 행보에 국민적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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