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청문회 과정서 겪은 심경 담담히 풀어헤친 자서전 최근 출판 기증하려던 땅 ‘탈세수법’으로 치부하던 그 국회의원 얼굴 선명‘청문회 돌풍이 지나고 가을 바람이 신선하게 불자 내 생일이 다가왔다. 남편이 생일선물이라며 오뚜기 두 개를 건네 주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오뚜기처럼 씩씩하게 이겨내라는 격려가 담긴 선물이다. 사실 몇 번 넘어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자서전 ‘지금도 나는 꿈을 꾼다’ 중)사실 장상 전총리지명자의 자선전 출판기념회(6월3일·세종문화회관)를 취재하러 가는 발걸음은 무척 무거웠다.

지난해 7월 총리인준 부결 이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얼굴에 ‘그때의 아픈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하는 염려때문이다. 그러나 출판기념회장에서 참석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를 본 순간 그러한 염려가 기우 였음을 알게 됐다. 그 전보다 훨씬 당당하고 의연한 표정으로 그는 남편 박준서 교수와 함께 참석자들을 반기고 있었다. 총리 인준 부결 이후 상처받은 그에게 오뚜기를 선물해 준 남편 박교수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듯 그는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자서전 ‘지금도 나는 꿈을 꾼다’에서 지난해 7월을 ‘치열하고 뜨거웠던 돌풍같았던 2002년 여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헌정사상 첫 여성총리 지명자’라는 타이틀 속에 엄청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장상 전국무총리 지명자, 결국 인사청문회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좌초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의 오늘은 여전히 내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장전총리지명자를 만난 것은 출판기념회 이튿날인 6월5일, 남가좌동 자택에서였다. 오랜 시간 가슴속 깊은 곳에 감춰 놓았던 ‘속내’를 1백여분의 시간이 넘도록 털어 놓았다.예상치도 못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와 주었다. 손수 자필사인을 한 책들은 일찌감치 바닥이 났다. 이어령 박사는 ‘청문회에 대한 한을 털어놓기 위해 쓰는 책이 될까봐’ 적잖게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박사는 자신의 그런 걱정이 책을 읽고 난 후 단숨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막 자선전을 출간한 장상 전 국무총리 지명자에게 책을 출간하게 된 동기부터 물었다.

-자서전을 쓰게 된 계기는. ▲인준이 부결된 이후 한 두어달은 쉬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산에도 가면서. 9월부터는 간간이 활동도 했다. 그러나 한 8개월간은 자서전에 몰입했다. 청문회에 대한 한이나 억울한 심정은 없다. 하지만 작년이 어렵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조용히 나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자신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살아온 삶을 짚어보면서 글로 썼다. 큰 뜻은 없었다.

-지난 청문회에 대한 억울함과 한을 표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컸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했다. 하지만 이미 자선전을 쓰려고 마음 먹었을 때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 같이 안정을 찾을 때였다. 물론 마치 나를 기득권층, 부잣집에서 자란 상류층 등 승승장구해온 사람으로 몰아갈 때는 ‘아 이 사람들이 사람을 너무 모르는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난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 자기 인생의 경험으로 남의 인생을 함부로 말하는 것에 대해 ‘실례를 하고 계신다(당시 청문회 국회의원)’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서전은 청문회의 아픔을 떠나 나 자신과의 대화를글로 옮긴 것일 뿐이다.

-지난해 청문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당시 심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당혹스러웠다. 참 나는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우회적으로 뭔가를 돌려서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내가 말하면 ‘장상이 말했으니까’라며 믿어줬다. 하지만 청문회 현장에서는 믿음이 통하지 않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을 뿐더러 그걸 왜곡해서 확대해 가는데 ‘아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당혹스러웠다. 예를 들면 양주군의 땅, 양로원 하려고 샀던 땅을 부동산 투기로 몰아가는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년을 가지고 있었는데 2~3배 올랐다고 들었다. 한 4억 약간 넘을 거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50억이라고 하면서 부동산 투기로 몰아가는데 그 당혹감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청문회 자리만 아니었다면 ‘여러분들…’ 하고 일장연설을 했겠지만 국회의원 있는 자리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하더라. 당시 그 땅은 부동산 관계자들도 국회의원들한테 사보라고 할 정도로 매매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93년 이 땅을 복지법인하려고 기증하려고 했던 것을 두고 ‘탈세를 위해서죠. 포탈하는 방법인데요’라고 한 국회의원이 말하는데 ‘아 저분은 나도 알지도 못하는 방법을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직도 그 국회의원 얼굴을 기억한다.

-정치권의 생리를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러더라. 정치권 생리를 너무 몰라서 대응을 못했다고. 하지만 정치권의 생리는 무엇인가. 사람사는 곳의 생리여야지 정치권의 생리라는게 따로 있어야 하나. 왜 거기에 맞춰야 되는가. 정치권의 생리 역시 ‘정직’하면 되는 것 아닌가. ‘2002년 7월11일 나는 신임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됐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보도에는 신선한 충격이라는 말과 국정경험이 없다는 염려가 뒤섞여 있었다. 여성참여의 기폭제가 되길, 놀랍다, 여재상 쇼크, 과감한 추진력에 뛰는 신학자, 여성특유의 유연성 기대, 일인다역 충실한 원칙주의자…등 등의 기사를 통해 내가 소개되었다. 여성총리의 탄생은 대단한 뉴스였다. 그러나 지명후 2,3일이 지나면서 언론의 바람은 이상한 방향으로 불기 시작했다. 총리직을 제안받았을 때도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가 7개월밖에 남지 않아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여야 대립이 치열하고 여러 국정과제가 난마처럼 얽힌 상황이라지만 당리당략을 떠나 사심없이 7개월을 일한다면, 그것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나라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가 일해오던 대로 원칙을 지키며 일한다면 어떤 성과가 있으리라 생각했다.(자서전 중)’

-지난 7월 임명받을 당시는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이 치열하게 대립된 상황이었다. 주저하진 않았나. ▲그 전에도 입각제의가 두 번 있었다. 두 번 다 고사했다. 이화여대 총장직을 마치기 전에는 하지 않겠다고 고사 의사를 밝혔었다. 총장직을 마치는게 1차적인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여름에는 이미 총장직을 마치고 새 총장을 뽑았을 때다. 당시 청와대에서 “7개월밖에 남지 않아 미안하다”며 입각제의를 해 왔다. 만약 정치에 나갈 꿈이 있었다면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당시만해도 한나라당의 집권이 유력했기 때문에 정치를 하려면 국민의 정부와 거리를 둬야 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정치적인 계산 따위 하지 않았다. 7개월간 나라에 봉사할 생각이었다.

-청와대측이 제시한 제의 배경은. ▲우선은 시기가 어렵지만 7개월 동안은 대선 엄정중립을 위해 힘써 달라고 전해왔다. 또 7개월이지만 여성의 고위직 진출에 상징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고 제의했다. 비록 경험은 없지만 7개월이니까 원칙대로 공정하게 대선을 치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수많은 여성후배들의 공직진출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청문회에서 걸릴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도 (청와대가)부탁하면서 청문회가 최초로 열려서 어렵다고 전해왔지만 ‘설마’ 했다.

-대통령이 직접 부탁했나. ▲그렇진 않았다. 나중에 마무리될 때 말씀했다.

-이희호 여사와 친분설도 나돌았는데.▲개인적 친분은 없다. 물론 이희호 여사와 공식적인 행사에서 몇번 만난 적은 있다. ‘이화여대 총장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좋게 평가해준 분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피난민으로 보냈던 어린시절도 정말 어려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청문회가 그때보다 더 힘든 기억인가.▲지난해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얻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면 그 돌을 쌓아서 기초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남편이 오뚜기를 선물해줬을 때 몇번 넘어졌느냐가 중요한게 아니고 마지막에 일어나는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라고 대답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많이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 자유로워졌다. 명예 자존심 체면 등을 잃어버리면서 진정으로 내 것을 찾게 됐다. ‘총리지명 이후 연일 신문과 TV에서 내가 파렴치한 인간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면서 어느날 우리 아들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여자 누구야. 되게 파렴치하네.”“아이들이 놀라면서 어머니 이건 어머니예요” 라고 말했다. “알아, 보도를 보면 정말 파렴치한 것 같아서.”신문에 난 기사를 내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부도덕이라는 단어만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정말 찢기는 아픔이었다.(자서전 중)’

-가족들 역시 상당히 힘들어했을 텐데.▲가족들 더 힘들었다. 20일간 총리직을 수행 하느라고 9시 뉴스를 못봤는데 직접 본 가족들의 가슴은 찢어졌다. 청문회때도 나는 맞는 느낌이라서 긴장을 했어도 겁은 안났는데 가족들은 제 3자로 지켜봐야 하니까 온 가족이 파김치가 됐다. 우리 박교수(남편)의 고통이 컸다.

-자서전을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는.▲우리시대에 주어진 과제인 불신의 증후를 극복할 수 있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 그러려면 투명해지고 정직해져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닌 윗물과 아랫물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런 결론에 자서전을 통해 불신지수를 낮추고 신뢰지수를 높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대북관이 확실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정부의 대북특검 조사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그 얘가는 하고 싶지 않다. 신문만 보면 어디서 어디까지 알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 시대의 우리의 과제가 통일임은 분명한데 반드시 평화적 통일이어야 한다. 남과 북의 신뢰가 아뤄지려면 우리 남쪽부터 신뢰가 구축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정책을 놓고도 서로 안 믿고 있다.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수행원으로 동행했는데. ▲통일부장관의 제의로 가게 됐다. 나도 모르게 여성대표가 됐더라. 북한에서 온 사람이 북을 한번도 안가봐서, 기회이구나 싶어 기꺼이 남측 여성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꿈을 꾸고 있는 앞으로의 장상의 모습은.▲지금까지 항상 내일을 꿈꾸며 살아왔다, 포부와 열망을 잊지 않고, 늘 꿈꾸며 그걸 현실화 시켜왔다. 꿈의 구체적인 것은 살맛나는 우리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 아닐까. 2년후면 정년퇴직인데 내 경험과 지식과 열정으로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것이다. 신뢰지수가 높은 우리 사회를 위해서 할 일은 참 많을 것이다. ‘돌이 마구 날아오는 한복판에서 그 돌들을 맞은 경험. 갑작스런 돌풍에 휩쓸리다가 팽개쳐진 느낌,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서는 경험이었다.<자서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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