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신들의 땅도 대한민국 ‘산악 퀸(Queen)’의 열정 앞에 두 팔을 벌렸다. 산악인 오은선(44·블랙야크) 대장이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를 모두 정복한 세계 최초의 여성이 됐다. 13년에 걸친 그의 도전은 그가 오른 11만5945m라는 천문학적 숫자와 함께 기록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지난해 7월 히말라야 등반 중 목숨을 잃은 동료 故 고미영(당시 42세)의 영정을 품에 안고 이룬 기적 같은 성공이란 점에서 의의가 크다. 물론 14좌 완등에 대한 국제 인증 절차가 남았지만 ‘히말라야의 여신’으로 등극한 오은선의 도전정신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철녀’ 오은선 대장의 히말라야 도전기는 13년 전인 1997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셔브롬Ⅱ봉을 시작으로 마침내 지난달 27일 안나푸르나(8091m)의 꼭대기를 밟아 14좌 완등 대장정에 ‘화룡점정’을 이뤘다.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들락거린 그의 산악인생은 ‘굴곡지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다. 2004년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한 후 하산하다 탈진하는 바람에 다른 원정대 셰르파(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사는 티베트계 네팔인·등반가의 길잡이 역)가 구해줘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2006년 시샤팡마 등정 길에는 얼음 덩어리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졌고 눈사태와 맞닥뜨려 목숨이 위태로운 적도 수차례다. 2004년 에베레스트 원정길에 동료 산악인 박무택이 로프에 매달린 채 숨져있는 것을 보고도 등반을 포기하지 않아 ‘독한 년’ 소리를 꼬리표처럼 달았다.

‘지독한’ 철녀의 행군은 2008년과 2009년 절정에 달했다. 14좌 완등을 목표로 2년 연속 4개의 봉우리를 정복하는 무서운 속도전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낳았다. 휴식시간을 아끼기 위해 캠프를 건너뛰는 강행군은 웬만한 남성 등반가도 혀를 내두를 만큼 엄청난 도전이었다.


‘인증샷’ 조작의혹, 라이벌의 질투?

세계에서 20번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정복했지만 아직 마지막 관문이 버티고 있다. 국제 산악계의 최고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홀리(86·미국) 여사에게 14좌 완등을 ‘인증’받아야 하는 까닭이다. 홀리 여사는 1963년부터 네팔에 거주하며 50년 가까이 히말라야 고봉 등반을 공식 인증해온 전문가다.

또 라이벌 에두르네 파사반(36·스페인)이 제기한 등반기록 조작 의혹에 대한 완벽한 해명도 필수다.

오 대장은 지난해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중 13번째로 올랐던 칸첸중가(8586m) 등정과 관련해 의혹에 휩싸인 상황이다. AFP통신 보도에 따르면 오 대장의 유력한 라이벌인 파사반이 지난달 27일 오 대장의 칸첸중가 등정 성공에 대한 결정적인 의문을 표했다. 오 대장이 칸첸중가 정상에서 촬영한 ‘인증샷’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파사반은 공영 라디오에 출연해 “오 대장이 칸첸중가에 오른 뒤 우리도 올랐다. 하지만 그가 찍은 사진들에는 내 사진과 달리 눈이 덮이지 않은 바위가 있었다”면서 “오 대장과 함께 올랐던 셰르파에게 물어봤는데 정상에 오르지 않았다고 했다”고 말했다.

파사반의 주장에 대해 영국 BBC도 관련 보도를 내보내며 힘을 실었다. BBC는 관련 셰르파의 증언과 사진, 로프 등을 근거로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오 대장의 칸첸중가 등정을 인정했던 홀리 여사마저 “오 대장이 하산하면 당시 셰르파와 함께 다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며 판단을 유보했다.

지난해 12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의혹을 전면 부정했던 오 대장은 다시 한 번 논란을 정면 돌파할 계획이다. 소속사 블랙야크에 따르면 오 대장은 안나푸르나에서 하산하는 대로 네팔 카트만두에서 해외 언론사를 상대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보고회를 열 예정이다. 홀리 여사와의 인터뷰도 이때 가질 공산이 크다.

일각에서는 ‘라이벌’ 파사반이 오 대장을 흠집 내기 위해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2008년까지만 해도 10개 봉우리를 정복하며 ‘여성 14좌 완등’ 기록에서 우위에 섰던 파사반은 오 대장과 속도전에서 밀리며 ‘2인자’가 됐다.


155cm 가냘픈 체구 ‘수원대 날다람쥐’

키 155cm에 몸무게 50kg. 작고 가냘픈 체구의 오 대장은 대학재학 시절 일명 ‘수원대 날다람쥐’로 불렸다. 산행이 서툴러 북한산 밑에서 선배들의 가방이나 지키던 스무 살 새내기가 신들의 땅을 품은 ‘히말라야 여신’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어려웠다.

1985년 수원대 전산학과에 입학한 오씨가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교내 산악 동아리 문을 두드리면서 부터다. 산악부원이 됐지만 타고난 산행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1학년 때 북한산 인수봉 아래서 선배들의 가방을 지키던 그는 2학년이 돼서야 인수봉 꼭대기를 밟았다.

이후 능숙하게 산길을 요리조리 헤치는 그에게 ‘수원대 날다람쥐’라는 귀여운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기암절벽을 온 몸으로 오르는 ‘맛’을 느낀 뒤 오 대장은 전문 산악인으로서의 꿈을 키웠다.

2004년 처음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고 명성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컴퓨터 학원 강사, 학습지 교사, 스파게티 가게 주인 등을 전전하다 전산직 공무원으로 변신했지만 “히말라야에 가기위해” 번번이 사표를 던지고 폐업을 선언했다.

그가 포기한 것은 안정적인 직업뿐만이 아니다.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화려한 싱글’인 오 대장은 “산만큼 나를 매료시킨 남자를 찾지 못했다”는 말로 이유를 대신했다. 수영과 요가로 기초체력을 다지는 그의 일상은 오로지 ‘산’에 맞춰져 있다.

지난해 7월 “안나푸르나를 함께 오르자”는 약속만 남기고 낭가파르밧 절벽에서 유명을 달리한 후배 고미영의 기억도 오 대장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당시 14좌 완등을 놓고 오은선과 경쟁을 벌이던 고미영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자 오 대장은 “과도한 경쟁이 원인이 됐다”는 비난에 극심한 심적 고통을 느껴온 것으로 알려졌다.


소속사·방송사도 ‘오은선 효과’

한편 오은선 대장의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소식에 소속사 블랙야크 역시 업계에서 ‘정상(頂上)’을 밟았다. 오 대장의 공식 후원업체이자 소속사인 블랙야크는 토종 아웃도어 업체다.

2008년 2월 등산화와 의류 등 등반장비 일체와 항공료, 입산료 등을 후원하며 오 대장과 인연을 맺은 블랙야크는 그를 익스트림팀 이사로 영입했다. 한번 등반할 때 드는 비용이 1억 5000만원 정도인 것을 감안해 업체는 오 대장이 9개 봉우리를 정복하는 동안 연봉을 포함 14억여원을 지원했다.

블랙야크의 전폭적 지원은 이번 오 대장의 도전 성공으로 빛을 발하게 됐다. 지난해 하반기 마지막 14좌인 안나푸르나 등정을 앞두고 오 대장에게 세계인의 관심이 모아진 것. 일명 ‘오은선 효과’가 업계에 불기 시작했고 자연히 블랙야크의 브랜드 인지도 역시 폭발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업체에 따르면 2008년 1100억원이던 매출이 후원 이후인 지난해 1800억원으로 63%나 급성장했다. 국내 아웃도어 시장의 높은 성장세를 감안하더라도 돋보이는 성적이라는 게 업체 측의 설명이다. 블랙야크는 올해도 ‘오은선 효과’에 힘입어 지난해보다 30% 늘어난 2300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오은선 대장의 등반기를 5시간에 걸쳐 생중계한 KBS 역시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이름값을 했다. KBS는 2TV를 통해 오후 12시30분과 오후4시5분에 각각 1시간30분, 3시간 동안 ‘여기는 안나푸르나’를 생중계했다.

이날 방송은 시청률 2.7%, 5.3%(AGB닐슨미디어리서치 기준)로 낮 시간임을 감안했을 때 상당한 선전을 한 셈이었다. 이날 KBS는 1TV를 통해 오후 10시 ‘여성 세계 최초 14좌 완등 오은선의 꿈과 도전’을 방송했고, 이 프로그램은 8.0%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비록 시청률은 한 자릿수지만 방송 시간과 지상파 방송사의 인기 드라마가 방영되는 황금시간대라는 점을 반영했을 때 놀라운 성적이다. 이날 MBC ‘동이’는 21.6%, KBS 2TV ‘부자의 탄생’은 13%, SBS ‘제중원’은 9.9%의 시청률을 올렸다.


#히말라야 고봉 14좌’가 뭐길래

히말라야 고봉 14좌란 히말라야 산맥에서 해발 고도 8000m 이상 되는 독립 봉우리 14개를 말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1986년 처음 이 14봉우리에 모두 오르면서 14좌 완등이란 개념이 생겼다.

오은선 대장을 포함해 14좌 완등에 성공한 산악인은 전 세계를 통틀어 20명이며 여성은 오 대장이 최초다. 이들이 기록을 달성하기까지 걸린 평균 기간은 13.6년이며 달성 당시 평균 나이는 42.5세다.

메스너와 경쟁을 벌였던 또 하나의 전설 예지 쿠쿠츠카(폴란드)와 한국의 박영석 대장이 8년 만에 성공했고, 세르조 마르티니(이탈리아)는 꼬박 24년이 걸렸다. 이는 개인의 탁월한 등반 기술 뿐 아니라 고지대에서 10년 이상 버틸 수 있는 강철 체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인류의 대도전으로 꼽힌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오은선 프로필

▶ 신체 : 키 1m55㎝ / 몸무게 50㎏
▶ 출생 : 1966년 3월 5일 전북 남원
▶ 소속 :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이사
▶ 학력 : 수원대 전산학과 졸업
▶ 가족사항 : 부모님, 1남2녀 중 장녀
▶ 등반경력 : 25년(1985년 수원대 산악부)
▶ 첫 해외원정 : 93년 에베레스트
한국여성등반대 대원
▶ 주요경력 : 한국 여성 최초 7대륙 최고봉 등정
(2006년),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2010년)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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