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못다한 일 죽어서 이루나

지난 1일 풍납동 아산병원에 차려진 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실장의 빈소에서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조문을 마치고 고인의 제자인 오윤지씨를 위로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00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민주동지회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과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뉴시스)지난 14일 풍납동 아산병원에서 고 화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유해가 장지로 향하기 위해 운구되고 있다. (맹철영 기자)

고(故)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안장식이 지난 10월 14일 오후 3시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엄수됐다.

정부는 북한체제를 반대하는 황 전비서의 업적을 기려 1등급 훈장인 무궁화장을 추서 했다. 망명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줄곧 뜻을 펴지 못 한 채 거의 ‘잊혀진 인물’처럼 여겨졌던 황 전 비서로서는 그야말로 명예회복인 셈이다. 더구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북한 3대 세습과 관련한 논의도 다시 불이 붙는형국이다. 살아서 보다 죽어서 더 많은 일을 한 황장엽 전 비서의 삶을 뒤집어본다.

북한 노동당 창건기념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 김정은이 1만여 병력의 사열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날인 지난 10월 10일 서울에서는 망명한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1997년 “조국(북한)의 체제에 의분을 느껴 그 변혁을 도모하기 때문”이라며 한국으로 망명한지 13년만이다. 황 전 비서는 국내에서 최근까지 미주탈북난민인권보호협회 상임고문을 맡아 왔지만 별다른 활동의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북한에서의 정치활동

1927년 2월생인 황 전 비서는 모스크바대학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을 공부했고,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54년 귀국한 후에는 28살의 이른 나이에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 교수가 됐다.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거쳐 1965년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올랐다.

김일성 사상을 주체사상으로 집대성해 ‘주체사상의 대부’로도 불렸던 그는 김일성 주석의 부탁으로 당시 후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개인강사를 맡게 됐다. 김 위원장의 백두산 출생설을 퍼트리는 등 후계구도 정립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된 이후, 1972년부터 1983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의장, 1980년 당 비서,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7년 사회과학자협회 워원장,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 여려 요직을 겸임했다.

1970년에 체계화한 주체사상을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해외에 주체사상 연구소를 설립, 북한 사상 창립과 확립을 주도했다.


망명 후 한국에서의 활동 제약

황 전 비서는 1997년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직후인 2월 12일 베이징에서 김덕홍 전 북한 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과 함께 한국총영사관에 전격 망명을 신청해 북한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나라가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했다”며 망명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자신이 담당하던 당 국제사업의 실패와 함께 흔들리는 당내 위치가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망명 후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무한할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을 김 부자가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황 전 비서가 1997년에 한국으로 망명한 직후 당 간부들을 상대로 한 비밀연설에서 그를 빗대어 “개만도 못하다”고 격렬하게 매도했었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지난 4월 4일 보도했다.

그는 각종 강연을 통해 김정일 정권 타도를 주장했다.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고 개혁개방과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진행된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그의 주장은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는 급속도록 가까워진 남북관계를 통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몰두했다.

그는 10년 간 활동제한조치를 당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 설 자리를 잃었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해제됐다. 이후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미국과 일본 방문이 그가 사망하기 얼마전에야 겨우 이루어졌고 이를 계기로 미국의 보수인사들과 함께 김정일 정권 타도와 북한의 인권상황을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공개 강연이 되었던 지난 9월 30일 대북 라디오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에서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 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등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정치철학을 중시했다.


북한이탈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

황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지난 10월 10일 오후 황 전 비서관이 위원장을 맡고 있던 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실에는 의원회 회원, 새터민 등이 모여 침통한 분위기 속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수 북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은 “탈북자들의 삶에 힘을 주시던 분이었는데, 팔다리가 다 떨어진 심정”이라며 “편찮으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가셔서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김일주 북한이탈주민후원회 회장도 “남북통일을 위해 내려오신 건데 그날을 못 보고 가셨다”며 말끝을 흐렸다.

황 전 비서는 탈북자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조언하는 등 탈북동포들을 상대로 각종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 북한이탈주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제자들은 “북한 사정에 해박하셔서 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라며 갑작스런 비보에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황 전 비서는 자유북한방송의 민주주의 강좌 프로그램을 맡아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전파하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해 탈북자들이 의지하는 대부이자 중심 역할을 했다.

북한민주화위원회는 지난 2000년 황 전 비서가 설립한 북한민주화동맹의 후신으로, 2006년 현재의 조직으로 확대됐다. 위원회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개선을 위한 대국민 캠페인을 전개하고 중국대사관의 탈북자 강제북송에 항의하는 등 관련 운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그가 꿈꿔 온 대북 활동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북한의 인권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고 최근 진행되고 있는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비판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황 전 비서가 고민했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한 ‘민족통일’이라는 무거운 주제는 아직 현재진행형인 분단국에 사는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다.

[박주리기자] park4721@dailypot.co.kr


#황 전 비서 가족 간 유산상속 분쟁 일어나나
황장엽, 사실혼 아내·아들 남겨

지난 10월 10일 별세한 황장엽 전 비서의 ‘국내 유족’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외부로 드러난 고인의 남한 가족으로는 수양딸 김숙향(68·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씨가 유일하지만 황 전 비서에게는 사실혼 관계인 부인 엄 모(49)씨와 고인의 눈매를 빼닮은 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엄씨와 아들은 황 전 비서의 호적에 올라 있지 않은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004년 모 언론사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이 아들은 1998년 10월 28일에 태어났으며 생모인 엄씨의 성을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엄씨는 북의 위협을 우려해 아들을 미국에서 생활하게 했으며 현지 초교 5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밝혔다.

이와함께, 황 전 비서는 상당한 유산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망명 당시 상당한 재산을 갖고 국내에 들어온 데다 정부와 각계의 후원금, 특강료와 저작물 인지세, 부동산 등 많은 재산을 남긴 것으로 보여 향후 수양딸과 엄씨 간에 유산상속 분쟁이 관측되고 있다.

엄씨의 한 지인은 “황 전 비서의 상속인은 수양딸이다. 황 전 비서는 사후 재산을 수양딸에게 넘긴 후 아들과 부인에 분배토록 약정서 같은 것을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수양 딸 김 대표는 13년 전 황 전 비서와 김덕홍 전 여광무역회사 총회장 두 사람의 망명을 중개한 인물로 알려졌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황 전 비서의 친서를 전달해 망명을 도왔다. 김 대표는 영문학을 강의한 교수로, 김철호 전 명성그룹 회장(72)의 여동생이다. 80년대 초부터 금강산 관광·개발을 추진해 온 김 회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북경에 머무를 때 황 전 비서와 함께 망명한 김 총회장과 인연을 쌓아 그들의 망명을 돕게 된 것이다.

1998년 12월, 김 대표는 황 전 비서의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황 전 비서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가족으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



#황장엽 프로필

▶ 전 외무공무원, 정당인
▶ 생몰 1923년 2월 17일 (평안남도 강동) ~ 2010년 10월 10일
▶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 박사
▶ 가족 딸 김숙향

수상내역
▶ 2010 국민훈장 무궁화장

경력사항
▶ 2008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상임고문
▶ 2007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 2003 전주대학교 석좌교수
▶ 2002 미주탈북난민인권보호협의회 상임고문
▶ 1999 탈북자동지회 고문
▶ 1998 국가정보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 1997.12~2000.11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 1993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 1987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 1984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 1984 당 중앙위원회 비서
▶ 1965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 1959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 1954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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