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안당국은 2월 초 북한을 빠져나와 지린(吉林)성 옌지(延吉)를 경유해 제3국으로 향하던 탈북인 30여 명을 세 곳에서 체포, 이미 일부는 북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탈북인들을 검거하기 위해 공안정보원 두 명을 탈북 남매로 위장, 침투시키기 까지 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면서 탈북인은 ‘3대를 멸족’시키겠다면서 단속을 강화했다. 중국에서 검거된 탈북인들은 북송되면 ‘3대 멸족’을 면할 수 없는 참혹한 처지로 떨어졌다. 

남한에서는 정치권은 물론 문화예술계 등 모든 분야에서 피검된 탈북인 30여 명을 북송하지 말라며 연일 시위를 벌인다. 인기 배우 차인표 씨는 서울 중국대사관 앞 시위에 나섰다. 중국이 탈북인들을 북송한다면 “탈북자 뿐 아니라 가족들 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이라고 절규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북송반대 무기한 단식 시위에 들어갔다. 중국에서 검거된 30여 명 중에는 홀로 탈북해 남한에서 정착해 살고 있는 딸이 있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18년 전인 1994년 탈북, 서울에 정착한 45세의 김옥화(가명) 씨가 그 비운의 여인이다.

동아일보 2월 24일 자 보도에 의하면, 김 씨는 올 2월 초 18년만에 처음으로 어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70세의 노모가 중국으로 탈출해 딸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김 씨는 전화기를 부둥켜 쥐고 외쳤다. “엄마, 내가 곧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

김 씨는 사흘 뒤 어머니가 숨어있는 중국으로 달려갔다. 18년 동안 생사를 모르던 모녀는 밤새 부등켜 안고 울었다. 김 씨는 아버지 안부부터 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북한을 탈출한 뒤 굶어 돌아가셨다고 했다. 자식을 굶기는 당신 처지를 자책하며 식음을 끊고 스스로 굶어죽었다. 막내 동생은 장마당에서 음식을 훔쳐먹다 발길질에 차여 입에서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김 씨는 중국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어머니를 한국행 탈북인 일행에 합류시킨 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김 씨는 “이제 효도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어떻게 여생을 행복하게 해드릴까 그런 생각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게 웬 날벼락인가. 어머니가 한국으로 오려다 선양(瀋陽)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김 씨는 다시 자신을 원망했다. 김 씨는 어머니가 중국으로 탈출한 뒤 탈북 브로커로 부터 “곧 한국으로 들여보내주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김 씨는 어머니가 제3국을 돌아 서울에 도착하려면 몇 달이 더 걸릴 것 같아 그 전에 어머니가 보고 싶어 중국으로 뛰어갔던 것이다.

김 씨가 떠나려 하자 어머니는 “며칠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느냐”며 딸과 잠시라도 떨어지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김 씨는 서울로 바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렵게 취직한 식당에서 해고될까 걱정돼 어머니에게 “몇달 뒤면 다시 만날 거야”라고 달래며 떠났다. 김 씨는 “그때 제가 며칠만 더 있었더라면 엄마는 체포되지 않았을 것을, 결국 제가 엄마를 죽게 만든 겁니다. 평생 이 죄책감을 어떻게 짊어지고 가야 하나요”라며 눈물을 쏟았다.

중국은 효녀 김옥화 씨의 피 맺힌 사연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아버지는 굶어죽었고 어린 동생은 배고파 음식을 장마당에서 훔쳐먹다가 맞아죽어야 했다. 김 씨 어머니는 굶주림의 동토를 벗어나기 위해 효성이 지극한 딸의 부름을 받고 나왔을 따름이다. 중국은 김 씨 어머니를 북한으로 압송,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를 심청이처럼 효성이 지극한 딸 곁으로 풀어주어 여생을 배불리 행복하게 지내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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