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일요서울>은 차기 주자들의 ‘용인술’을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2007 대선 전 당내 경선을 치르기 위한 선거캠프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동영 김근태 이해찬 박근혜 이명박 고건 손학규 등이 그 대상이다. 민심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차기 대통령감’ 여론조사 결과를 볼 때 이들 7인이 2007년 대권 도전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판단에서다. 물론 이들 중 누군가는 청와대의 주인이 될 것이다. 먼저 연말연초 당 복귀 및 전당대회 당의장 출마가 유력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무현 후보와 함께 지난 민주당 경선을 완주한 최후의 후보였음에도 아직 그의 ‘용인술’은 검증받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경선완주가 오늘의 ‘대권주자’로
최종 승리보다는 ‘참여’하는 데 의의를 두었던 탓이다. 경선 과정에서 다른 대권 주자들이 낮은 득표율을 이유로 포기했지만, 노무현 후보와 끝까지 경쟁한 이유도 이 때문이라는 것. 그럼에도 당시의 경선 완주가 현재 여권내 가장 강력한 대권 주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이는 당시 정동영 후보 캠프의 인맥이 그리 두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권내 가장 유력한 주자로 부상한 지금에도 눈에 띄게 드러나는 조직은 없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정 장관의 한 측근 역시 “여권에서 가장 앞선 인지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사단을 거느리고 있을 것으로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전했다. 조직을 만들거나 상시 가동하지 않는다는 것.
정치권 입문 후 미래를 위해 계파 등을 만드는 것에 소극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아직 ‘캠프’라 부를 만한 조직도 갖춰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수직적인 사조직 및 외곽조직보다는 수평적인 네트워크,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전문가 그룹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 장관의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 장관 지근거리에서부터 살펴보자면, 올해 초 미국으로 유학길에 나선 정기남 전 보좌관이 있다. 워싱턴에 있는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는 내년 2월 말경 귀국할 예정이다. 공교롭게도 정 장관의 당 복귀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그의 향후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 전 보좌관은 정 장관의 핵심측근으로 지난 17대 총선에서 당부대변인을 맡았으며, 언론의 조명을 가장 많이 받았던 참모다.
‘전언회’의 영향력 주목
정 전보좌관 외에 정 장관을 그림자처럼 보좌하고 있는 참모들이 또 있다. 정 장관의 핵심참모 그룹은 96년 그가 전주 덕진에 출사표를 던질 때부터 동고동락한 이들로 구성된다. 특히 정 장관의 시니어 측근으로 통하는 황세권씨는 참모그룹의 핵심으로 분류되는 인사다. 정 장관의 보좌관 출신으로 현재 재정경제부 장관 정책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동렬 보좌관 역시 정 장관의 핵심측근으로 통한다.
또 정 장관의 보좌진 출신인 한 인사는 최근 여의도에 개인사무실을 마련해 주목을 끌고 있다. 정 장관과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선의 전초전 성격을 띤 내년 2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전에 재결집할 태세다. 정 장관의 당의장 출마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향후 공식적인 ‘캠프’ 발족에 대비한 인력 충원 움직임도 감지된다. 더 멀리 대선 후보 경선까지도 내다보고 있음은 물론이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 장관이 당의장에 선출된 이후 그에 의해 영입된 인사들의 역할도 정치권의 관심 대상이다. 이들은 ‘당선’과 ‘낙선’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으나 때가 왔을 때 한 배를 탈 사람들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먼저 원내 인사들로는 이계안·이근식·노웅래·채수찬·최규식 의원 등 지역구 20여명과 박영선·정덕구·민병두 의원 등 비례대표 10여명 등 30여명이 ‘정동영 사람들’로 분류된다. 또한 정 장관의 당 내 조직 중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라 할 수 있는 ‘바른정치모임’도 빼놓을 수 없다. 정 장관 본인과 위에서 언급한 인사들 상당수, 그리고 이강래·김한길·이종걸 의원 등이 참여하고 있다. 원외인사 중에는 양기대·이재경·김방희씨 등이 꼽힌다. 한편, 상주 직원이 두 명뿐이지만 ‘나라비전연구소’도 정 장관의 당 복귀와 맞물려 세 확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정 장관과 가까운 학자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각종 현안들을 놓고 세미나를 개최하던 곳으로, 정 장관의 외곽조직이라는 시각이 많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다.
원내외 ‘친정인맥’ 두루포진
반경을 넓히면 정 장관 주변의 전문가 그룹이 눈에 들어온다. 입각한 이후 통일이나 외교안보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듣고 있는데, 박재규·정세현 전통일부장관, 윤영관 전외교통상부장관, 조세형 전주일대사 등을 주기적으로 만나는 것으로 전해진다. 기자 출신인 정 장관의 언론계 인맥은 이미 17대 총선에서 드러난 바다. 시간을 돌려 당시를 비춰볼 때, 박영선 MBC 경제부장과 MBC 라디오에서 ‘손에 잡히는 경제’ 진행을 맡았던 김방희씨가 정 장관의 경제특보로 영입된 이후 총선에 출마했으며, 문화일보 기자 출신인 민병두 총선기획단장도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한편, 한 언론계 인사는 “정 장관의 모교이자 전북 지역의 명문, 전주고 출신 언론인 모임인 ‘전언회’는 정 장관의 잠재적인 지원세력”이라고 진단했다. 언론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 장관은 이 모임의 창립 멤버로서 실무자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전언회 후배가 바로 양기대씨로 그는 지난 총선에서 당 부대변인으로 활동했다. 학계에서는 서울대 72학번 동기가 꼽힌다. 배영수(서울대)·임혁백(고려대)·권만학(경희대)·조형식(서울대)·나성린(한양대) 교수 등이 정 장관을 돕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권만학 교수는 정 장관의 서울대 문리대 동기로서 ‘시위’를 계기로 알게 됐으며, 정 장관은 권 교수를 ‘분신’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 스타 정치인 정동영 대규모 참모그룹 ‘왜’ 없나 했더니…
정동영 장관이 대단위 참모그룹을 거느리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53년생으로 ‘유신철폐’를 외쳤던 서울대 문리대 시위에 가담하며 철창신세도 졌던 그였지만, 또래의 정치인들과 당시 정 장관의 삶은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유신에 저항했던 현 정치인들 중 상당수가 대학 졸업 후 재야운동가로 발전한 반면, 정 장관은 졸업도 하기 전인 78년 MBC 기자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후 뉴스 앵커로 활동, 큰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그는 96년 초 대학 친구였던 이해찬 국무총리(당시 국회의원)로부터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으라는 권유를 받는다.
기자 출신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대변인으로서 활동했다는 점은 주목할 대목이다. 정 장관 역시 “대변인직은 총재의 지근거리에서 총재를 보좌하고 당의 각종 의사결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정치과정을 속성으로 빨리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당내 주류인 동교동계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정치인으로서의 순항은 계속됐다. 국민회의와 민주당을 거치는 와중에도 대변인을 3년도 넘게 세 차례에 걸쳐 맡았고, 이때 쌓인 대중적 인지도는 그가 정치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이른 바 ‘스타 정치인’, 그는 한 때 총선에서 최다득표로 당선되기도 했다. 50대, 정 장관이 재선의원이었던 2000년. ‘40대 기수론’으로 민주당 최고위원에 당선된 그는 압도적인 동교동계의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2선 퇴진’을 주장하면서 2001년 정풍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일약 ‘반동교동계’의 대표 인물로 부각됨과 동시에 개혁 인물로 부상, 차기주자로 거론되고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개인기.’ 이는 정 장관의 장단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말이다. 이렇다할 계보 및 인맥이 없어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는 정객들의 비꼼과 부러움이 섞인 수식어인 것이다.그러나 ‘때’가 되면 정 장관 주변에 사람이 몰릴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정 장관의 고향인 전북 순창 출신으로 여권에 몸담고 있는 한 인사는 ‘기자 정동영’ 시절의 과거사를 전했다. 정 장관이 정치부 기자로서 정당에 출입할 무렵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치판에서 향우회 및 동문회 등은 정치인은 물론 기자들도 빠뜨리지 않고 참석하는 자리다. 순창 향우회에 종종 참석하곤 했다는 그에 의하면, 정 장관의 사람을 끌고 당기는 매력이 참석한 정치인 뺨을 칠 정도였다. 그는 “‘정 기자는 정치를 해도 잘 할 사람’이라고 다들 말했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