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71)·신건(64)씨가 불법 감청을 주도한 혐의로 15일 전격 구속되면서 역대 정보기관 수장들의 어두운 과거사가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61년 5·16 쿠데타 직후 제정된 중앙정보부법은 이후 30여년간 한국 정치에서 헌법 다음 가는 비중을 차지했다”는 한 정치평론가의 발언은 역대 정보기관장이 향유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역대 정보기관장들의 말로는 구속과 사형, 암살설로 얼룩지는 등 결코 평탄치 못했다. 특히 권력의 뒤안길에서 한결같이 그 부메랑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이들의 말로는 ‘권불십년’이란 교훈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아 씁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중정시절 김형욱 이후락 김재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문패와 ‘남산’으로 대표되는 중앙정보부의 역사는 1961년 5월 1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씨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중정은 사회통제 기능 외에도 정보를 사유화시킴으로써 특정층이 권력을 유지하게끔 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측면이 강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정부장들은 ‘국가안보’보다는 ‘권력’ 및 ‘정권안정’에 충성을 다한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제 2인자로서의 권력을 행사했지만 일단 대통령의 ‘눈’ 밖에 나면 비참한 최후를 맞는 운명에 처해졌다.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63~69년 중정부장을 지낸 김형욱(5대)은 역대 중정부장 중에서도 박정희에 대한 광신적 충성심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멧돼지’라는 별명답게 우락부락한 외모에 명석하고 빠른 두뇌회전 능력을 갖고 있던 그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역대 최장수(6년3개월) 정보기관장으로 통했던 김형욱의 최후는 비참했다. 절대적인 권력에 밀착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권력을 향유했던 그는 권력과 괴리가 생기자 미국으로 망명,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미국 의회에서 박 전대통령에게 불리한 증언 및 유신정권 비난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79년 프랑스 파리에서 돌연 실종됐다. 김형욱의 실종은 ‘파리 양계장 분쇄기 살해설’ 및 ‘박 전대통령 직접 사살설’, ‘센강 수장설’, ‘파리 조폭 살해설’ 등 수많은 루머를 낳은 채 아직까지 박정희 정권의 3대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겨진 상태다.이후락(6대)은 대통령 비서실장, 중정부장을 지내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호가호위하면서 3선개헌이 마무리되는 시기까지 제3공화국 실세로 통했다.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패배한 김대중 전대통령이 “나는 박정희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고 말한 것만 봐도 당시 정권에 대한 그의 충성심(?) 및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그는 한 나라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으로 ‘떡값’이라는 말을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회자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부정축재 의혹에 연루되었을 때 그는 “떡을 만지는데 떡고물은 자연히 떨어진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 밝혀진 떡고물만 당시 194억원(현재로 환산할 때 대략 2조원)이라는 사실에 국민들은 천인공노했다.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이후락이었지만 73년 8월8일에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은 그의 날개를 꺾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책임을 지고 중정부장에서 물러난 그는 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후 공화당에 입당, 80년 제 5공화국 출범 후 정계에서 물러났다. 대통령의 신임을 잃은 그는 영국령 바하마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신변안전을 보장받은 74년 2월에 귀국, 모처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그의 근황에 대해서는 치매 및 건강 이상설, 여주 도자기마을 은둔설, 울산 낙향설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돌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74년 건설부장관을 거쳐 8대 중정부장의 자리에 올랐던 김재규(8대)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주인공. 10·26사건의 주역인 그는 아직까지 역사적 평가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대통령과 동향출신인 그는 광복 후 같이 군에 입대한 동기(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이자 교사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는 공통점 외에도 키와 신체조건까지 비슷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전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그는 3군단장, 유정회 회원, 정보부차장, 건설부 장관, 중정부장 등 온갖 요직에 군림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후 80년 5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최근 10·26과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주군의 총애로 권력을 누렸던 자가 주군을 살해한 죄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운명’은 역대 중정부장중 가장 기구하다고 할 수 있다. 또 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역임했던 전두환씨는 대통령 ‘권좌’와 ‘백담사’ 은둔생활이라는 인생의 ‘극과 극’을 두루 경험하는 운명에 처하기도 했다.

국가안전기획부 유학성 이현우 안무혁 김덕 권영해

12·12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중앙정보부의 이름을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꾸는 동시에 중앙정보부 시절 구파세력들을 제거해 나갔다. 음습한 ‘공작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명까지 했지만 ‘중정’의 그림자는 너무 짙었다. 이 시기는 중정 시절 권력의 심장부에 있던 인물들이 정권교체와 함께 ‘날개없는’ 추락을 한 시기이기도 했다. 안기부 시절 안기부장을 거쳐간 인물은 유학성씨를 시작으로 총 11명에 달한다. 마지막 중정부장이자 초대 안기부장으로 ‘구파 숙청작업’을 진두지휘한 유학성(11대)씨는 12·12에 가담한 혐의로 옥고를 치러야 했다. 또 지난 66년 파월 맹호부대 중대장 시절 전두환 전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장세동(13대)씨는 전 대통령이 집권한 7년 중 5년간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맡아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등 일명 ‘전두환의 그림자’로 통했다.

그러나 5공 시절 정권의 핵심에서 전두환의 후계자로까지 떠오르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는 퇴임 후 ‘5공의 업보’에 따라 여러 차례 수감되는 운명에 처했다. 그는 89년 일해재단 영빈관 건립 등 5공비리에 연루돼 처음 구속된 뒤 93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 5·18 광주민주화항쟁 사건으로 재구속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6공 때 노태우 대통령의 신임을 얻으며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낸 이현우(19대)씨는 95년 11월 기업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또 6·10 항쟁이 한창인 87년 전두환 정권을 유지하는 핵심 권부였던 안무혁(14대) 전 안기부장은 전 대통령이 재벌 총수로부터 6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건과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YS정부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김덕(20대)씨는 안기부장 재직 시절 지방선거 연기 공작을 추진한 사실이 드러나 95년 2월 부총리에서 낙마하는 한편 올 가을 불법도청 조직인 미림팀과 관련해 검찰에 소환되기도 했다.

YS시절 정권의 핵심이었던 권영해(21대)씨는 역대 최장수 안기부장을 역임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핵심 실세였으나 정권교체 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는 공안사건 조작 및 안기부의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 등에 연루돼 4차례나 기소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또 재임 시절 국내정치에 북한을 이용하려 한 이른바 ‘총풍(銃風) 사건’과 관련,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권씨는 재직 중 직무와 연관된 일로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번에 구속된 두 전국정원장의 경우와 비슷하다. 특히 98년 3월 북풍을 주도한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던 권씨는 서울지검 특별조사실 화장실에서 면도칼로 자해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국가정보원 이종찬 천용택 임동원 신건

국민의 정부는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이라는 좀 더 부드러운 명칭으로 바꾸는 등 좀 더 혁신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권력자들의 수난은 계속됐다. 첫 번째 주자는 ‘정보는 국력이다’를 모토로 내세워 국정원 개혁작업을 주도했던 초대 국정원장 이종찬(22대)씨. 한때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됐던 그는 99년 10월 국민회의 부총재 재직 시절, 언론장악 시나리오를 담은 언론대책문건 유출 파문으로 회생불능의 사향길을 걷는 운명에 처했다. 국방장관에 이어 국정원장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천용택(23대)씨는 99년 12월 ‘삼성그룹의 DJ 대선자금 지원’ 발언으로 취임 7개월만에 단명했다.

그는 또 ‘안기부·국정원 불법도청’ 사건과 관련, 미림팀의 도청테이프와 녹취록을 보관하면서 이를 활용한 의혹으로 검찰에 소환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특히 이번에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이 검찰에 구속됨에 따라 국민의 정부시절 당시 역대 국정원장은 모두 ‘사멸’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하게 됐다.이번 수사는 관행적으로 이뤄진 국가기관의 불법 행위에 대해 칼을 들이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핵’으로 불리며 국가최고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권력과 영화를 누렸던 이들의 씁쓸한 말로는 권력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DJ정부시절 ‘햇볕정책의 전도사’ ‘법조계 호남인맥의 대부’로 불린 두 전 국정원장의 동시구속이 불러온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 임동원 구속 후폭풍‘햇볕전도사’ 별칭… 대북관계 냉기류 우려

이번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구속과 관련해 일각에서는 북한의 반응에 주목하고 있다. 핵심은 임 전원장이 ‘햇볕전도사’로 불릴 만큼 대북관계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거쳐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뒤 99년 12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국정원장을 지낸 임 전원장은 DJ정부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대북관계의 핵심인물로 꼽혔다. 국민의 정부 임기 내내 대북정책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그는 DJ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때 배석한 유일한 남측 인사이기도 하다.그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측과의 막후 협상을 책임졌을 뿐 아니라, 한반도 정세가 경색됐던 2002년 4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김 위원장과의 담판에 나서는 등 북한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들을 도맡아 처리해왔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8월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남측 대표단의 김일성 주석 생가방문 사건으로 통일부 장관에서 물러난 임 전 원장을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로 다시 복귀시켰을 만큼 그의 뛰어난 협상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처럼 임 전원장이 그간 남북관계의 주축이자 핵심인물이었다는 점, 남북관계의 모든 실타래를 풀어낸 중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구속은 북한의 심기를 건드릴 소지가 다분하다. 특히 얼마전 북한은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의 퇴출과 관련, 금강산 관광을 제한하는 등 강한 유감을 표시한 바 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18일부터 정상화되는 금강산 관광으로 겨우 가라앉힌 냉각기류가 이번 사건으로 또다시 재발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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