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봄’ 카이스트

[일요서울|최은서 기자] 지난해 4명의 학생과 1명의 교수가 잇달아 자살해 파문을 일으켰던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에서 또다시 재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 봄에 이어 1년 만에 다시 빚어진 비극은 카이스트를 ‘자살 충격’에 빠뜨렸다. 이미 퇴진 압력을 받고 있는 서남표 총장은 이번 자살 사건으로 지난해 자살 사태 이후 내놓은 학내 제도 개선안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 되는 등 곤혹스런 처지에 놓이게 됐다. 카이스트는 파장을 우려해 비상대책팀을 구성하는 등 긴급 대책 마련에 나섰다. 카이스트는 연쇄자살로 이어진 지난해의 악몽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로 크게 술렁이고 있다.

▲ <뉴시스>

지난해 자살 사태 이후 내놓은 학내 제도 개선안 실효성에 의문 제기
“획기적 변화 있기 전까지 이런 비극이 계속 일어날 가능성 높다”

지난 17일 오전 5시 40분께 대전 유성구 구성동 카이스트 기숙사인 미르관 앞 잔디밭에서 이 학교 전산학과 4학년 김모(23)씨가 15층 옥상에서 뛰어내려 쓰러진 채 발견됐다. 김씨는 잔디밭을 지나던 학생들에게 발견돼 심폐소생술을 받고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병원 도착 전에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김씨가 이날 오전 4시 35분께 자신의 방에 있는 4층에서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 내리는 장면이 CCTV에 찍혀있고 17층 건물인 기숙사 옥상 문이 닫혀 있고 15층 창문이 열려있는 점으로 미뤄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열정이 사라졌다”

광주 과학고 출신으로 2007년에 카이스트에 입학한 김씨는 군에도 갔다 왔으며 평소 학교 성적도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직전 학기 성적도 4.3점 만점에 3.3점으로 높은 편이었고, 의사집안 아들로 집안형편도 넉넉했으며 동아리 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밝은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투신 전 가족과 룸메이트에게 유서 형식의 메모를 남겼다. 유서에는 ‘눈물만 흐른다. 열정이 사라졌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해도 즐거웠는데, 요즘 열정을 내보려 해도 순수성이 사라져 힘이 나지 않는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엄마, 아빠, 동생 사랑해요’, ‘형 간다. 허세 부리느라 많이 못 놀아줘서 미안해.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씨는 평소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도 유서내용으로 미뤄 김씨의 투신 원인을 진로 불안으로 보고 있다.

김진형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는 “성적에 문제가 없었으며,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학생도 아니였기 때문에 더 충격적이고 당혹스럽다”며 “학교가 학생들을 공학도·엔지니어로서 교육시켜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이 학생 스스로 긍지를 가질 수 있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런 식의 교육을 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대책 마련 ‘분주’

재학생이 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일어나자 카이스트는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카이스트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교학부총장을 중심으로 학생지원본부장과 학부 및 대학원 총학생회장 8명으로 구성된 비상대책팀을 구성해 재발방지대책 마련에 나섰다. 카이스트 관계자는 “비상대책팀을 설치해 학생들에게 어떤 것이 더 필요한지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며 “언론에서 계속해서 이번 사건이 보도되면 연쇄 사고가 우려된다. 지난해처럼 (잇단 자살 사건이) 또 일어나면 학생들에게도 상처가 되고 학교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라며 이번 사건과 관련한 언급을 자제했다.

서 총장도 긴급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학교 책임자로서 가슴 아픈 일이 발생한 데 대해 유가족에 죄송스럽고 비통한 마음이며, 카이스트 전 구성원과 함께 애도를 표한다”며 “구성원들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고 재발 방지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카이스트 측은 지난해 1월부터 4월 초순까지 4명의 학생이 잇따라 목숨을 끊은데 이어 생명과학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박모(54)교수가 자살해 큰 충격을 던져줬다. 당시 ‘서남표식 개혁’이 여론의 도마에 올랐고, 징벌적 등록금 제도, 전 과목 영어 수업 등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셌다. 학교와 교수협의회 간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카이스트는 혁신비상대책위를 통해 개선안을 마련해 징벌적 수업료 폐지, 전과목 영어수업 축소 등의 조치를 취해 안정을 되찾았다. 이와 함께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정신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상담시스템을 구축, 학생 상담 강화 등을 시행했다.

학내 제도 개선안 ‘시큰둥’

하지만 이번 재학생 자살 사건으로 교수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난해 자살 사태 이후 학교 측이 내놓은 학내 제도 개선안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고개를 드는 등 서 총장 퇴진 문제가 또 불거질 전망이다.

혁신비대위원장을 지낸 경종민 교수협의회장은 “징벌적 수업료 폐지로 학생들의 부담이 덜어졌고 학교 측이 상담시스템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면서도 “전 과목 영어강의가 완화됐다고는 하나 전공과목은 영어로 진행돼 부담스러워 하는 학생이 많다. 학교 측이 바깥에 어떻게 보일까 신경 쓰는 것보다는 진심으로 학생들의 입장을 헤아리고 융통성 있게 대안을 찾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사실상 지금 역시 변한 것이 없다. 지난해 자살사건 이후 실질적 움직임이 없다. 학생들이 가진 가능성들이 뻗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획기적인 변화가 있기 전까지는 이런 비극이 계속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총장을 바꾸어야 한다. 카이스트 교수의 80%도 서 총장 퇴진 성명을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이어 “서 총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육이념을 강요하는 식으로 학교를 운영해 카이스트가 지난 40년 동안 해오던 토론식 교육과 같은 좋은 전통들이 무너지면서 갈등이 빚어졌다”며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학생들을 끌고 가고 따라 오지 않으면 추방하는 식의 리더십으로는 학생들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을 드러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학교 개혁 방향 등을 둘러싼 서 총장과 교수협의회의 날선 대립 역시 학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사태 이후 서 총장이 혁신비상위의 개선안을 이사회 승인을 이유로 바로 시행하지 않으면서 서 총장과 교수협의회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교수협의회는 서 총장의 특허 문제 등을 제기하며 총장퇴진 요구했고, 서 총장은 교수협 회장 등 교수 3명을 명예훼손죄 및 사문서 위조죄로 고소했다. 현재 이 고소고발 건은 경찰 조사 중이다. 서 총장은 지난 2월 “카이스트에는 총장이 600명이라고 보면 된다”고 우회적으로 불만을 드러내 발언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시선이 쏠리기도 했다. 경 교수협의회장은 “교수협의회와 서 총장의 갈등이 학내 분위기 침체를 가져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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