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약청 각계 의견 수립 이르면 다음달 최종안 확정

▲ '의약품 재분류안 및 향후 추진계획' 발표하는 식약청 <사진자료 = 뉴시스>

[일요서울 | 유수정 기자] 식약청의 의약품 재분류 결과 발표를 앞두고 의사 처방 없이 사후피임약을 구입하는 방안에 대한 의·약계의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은 7일 사후긴급피임약을 약국에서 살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는 내용의 ‘의약품 재분류안 및 향후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식약청은 각계 의견 수렴을 거쳐 이르면 다음 달 최종안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식약청은 사후피임약은 성관계 후 72시간 내에 1회 복용하는 약으로 사전피임약보다 호르몬 함량이 10~15배나 많은 고농도의 호르몬제이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거의 보고되지 않아 약국 판매 약으로 전환키로 했다.

식약청에 따르면 사후피임약은 여성호르몬 수치에 영향을 미치고 심근경색·뇌출혈·혈전증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사전피임약보다 부작용 발현 양상이 적으며 장기 복용이 아닌 1회성 의약품이라는 점이 감안됐다.

또 성폭행 등으로 인한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고 낙태 수술을 방지하기 위한 응급조치용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일반의약품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다.

식약청 김성호 의약품안전과장은 “사후피임약은 구토·구역질이나 일시적 생리주기 변화 등 가벼운 부작용이 흔하지만 이는 48시간 내에 사라진다”며 “대부분 경미한 부작용일 뿐 혈전증과 같은 심각한 증상은 국내 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식약청은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한 이유 중 하나로 의약선진국의 시스템을 제시했다. 영국·프랑스·캐나다 등 대부분의 의약선진국에서는 이미 사후피임약이 연령제한 등을 두고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돼 약국 등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이다.


72시간 이내 복용 ‘사후피임약’, 선택은 의사가 아닌 소비자의 몫…

대한약사회는 의사 처방이 필요한 사후피임약이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하는데 긍정적이다.

대한약사회는 지난 3일 성명을 통해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이 시급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약사회는 “사후피임약은 성관계 뒤 늦어도 72시간 이내 복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성관계 직후에는 의사도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전문의사가 환자와 대면 아래 처방해야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며 “오히려 약국에서 충분한 복약 설명에 따라 제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어차피 소비자 스스로의 판단으로 복용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만큼 일반 약으로 판매하는 것이 타당하다는게 약사회의 입장이다.

시민단체 등도 식약청의 사후피임약 일반의약품 전환에 관한 발표에 호의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경실련 남은경 사회정책팀장은 “사후긴급피임약은 한시라도 빨리 복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여성의 건강권과 선택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계는 “우리나라의 사전 피임률이 낮다는 이유로 여성의 사후피임약 선택권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며 “콘돔 사용 등 남성들의 사전 피임률을 높이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전했다.

 

▲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재분류에 반대하는 낙태반대운동연합 <사진자료 = 뉴시스>

 
의료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 시 오·남용 우려… “해외서 이미 입증된 것”

그러나 보건복지부의 사후피임약 일반의약품 전환에 대해 의료계는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대한산부인과학회와 대한산부인과개원의협의회는 사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부인과학회는 “당장의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 국민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할 것”이라며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학회에 따르면 사전피임약에 비해 10배 이상의 고농도 호르몬이 함유된 사후피임약은 응급상황에 한해서만 처방되어야 하는데 사전 피임률이 2%에 불과한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약으로 분류될 경우 오·남용 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학회는 “사후피임약은 피임 실패율이 최대 42%에 이를 뿐만 아니라 먹는 횟수가 늘수록 피임률은 떨어지고 구토·출혈·자궁 외 임신 같은 부작용만 커진다”며 “피임약 복용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시기상조인 정책”이라고 말했다.

이어 “출혈을 월경으로 오인해 임신 진단이 늦어지고 자궁 외 임신으로 난관 파열 등을 초래할 수 있다”며 “사후피임약을 일반 약으로 전환한다면 정삭적인 피임률 향상이 더욱 어려워져 결국 낙태 예방정책의 실패를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청소년들의 성 노출이 늘어난 상황에서 사후피임약의 일반 약 전환은 올바른 성의식과 피임 문화 정착을 방해할 것”이라며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면 무절제한 성관계의 빈도가 증가해 낙태 위험이 증가하고 각종 성병과 여성 골반염 등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세계보건기구(WHO)의 1998년과 2002년의 조사결과를 인용해 사후피임약의 부작용으로 구토·어지럼증·두통·복통 등의 증상이 빈번하게 발생했음을 이유로 들었다.

이와 함께 미국 등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한 나라에서 사후피임약 사용률만 늘었을 뿐 임신율 변화가 없고 성병만 증가했다는 보고서를 제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0년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 노르웨이는 약의 판매량은 30배 이상 증가했으나 낙태율 감소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스웨덴 역시 지난 2001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 이후 2007년까지 매출액은 3배 가까이 늘어났으나 낙태율은 되려 17% 증가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도 임신율이나 낙태율의 차이가 없다며 ‘무방비 성행위’ 빈도만 늘어났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심야나 주말에는 문을 여는 약국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사후피임약이 정말 응급한 약이라면 병원에서 직접 투약할 수 있도록 ‘의약분업 예외약품’으로 지정해 분류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학회는 “사전피임약 복용률이 낮은 상황에서 사후피임약이 일반 약으로 풀리면 사전 피임을 소홀히 해 낙태가 증가할 것”이라며 “낙태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이 아닌 올바른 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과 효과적인 사전 피임방법의 보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국의사총연합 역시 “의사들의 우려와 경고를 무시하고 이 같은 결정을 내린 식약청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수많은 부작용을 가져오게 될 이 전환계획을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사후피임약 논란, 결국 ‘제 밥그릇 싸움’… 소비자만 혼란

식약청이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과 더불어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한 것에 대해 의사 측은 두 제품 모두 처방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약사 측은 둘 다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각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고는 있지만 양측 모두 각자에게 유리한 입장을 내놔 결국은 ‘제 밥그릇 싸움’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편 식약청은 의·약계 양측의 의견과 사회적 여론 등 오는 15일 있을 공청회에서 사후피임약의 일반 약 전환과 오남용 방지 대책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계와 종교계가 반대 의견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는 미지수다.

이런 가운데 의약분업 후 12년 만에 대대적으로 손질한 의약품 분류와 국내 도입 44년 만에 사전피임제가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된다는 소식에 소비자들의 혼란만 가중됐다.

소비자들은 앞으로 의사에게 처방을 받고 사전피임약을 구매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게 될 처지에 놓였으며 사전피임약의 부작용을 뒤늦게 거론한 보건당국의 행보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특히 사전피임약은 여성들이 피임목적 이외에도 생리주기 조절 등의 이유로 손쉽게 이용해왔던 의약품이라 불편이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crystal0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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