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해군의 고속정 ‘참수리 357호’가 2002년 6월 29일 10시 25분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고 침몰 된지 꼭 10년이다. 장병 6명이 전사했고 1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고 최악의 우리 해군 손실이었다.

그 해 7월 1일 전사자들에 대한 영결식이 국군수도병원에서 거행됐다. 그러나 당연히 거기에 있어야 할 김대중 대통령은 없었다. 그는 일본서 열리는 한·일월드컵 결승전을 구경하기 위해 참수리 침몰 다음 날 일본으로 떠나 거기에 머물렀다. 그는 전사자 영결식에 국무총리도, 국방장관도, 군 지휘부도 보내지 않았다. 그 저의는 분명하다. 참수리 피침으로 들끓던 국민들의 분노가 전사자 영결식을 계기로 더 더욱 격렬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정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고 더 퍼주기 위해서였다. 이적행위였다

그러나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남북전쟁 중인 1863년 11월19일 펜실베이니어 주 게티스버그에서 거행된 전몰장병묘지 개막식에 만사를 제치고 참석했다. 당시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중이었으므로 멀리 떨어진 게티스버그 까지 갈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국회에 보낼 신년사를 쓰고 있었던 중 이었으므로 긴 여행에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에 아들 테드까지 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링컨은 게티스버그로 떠났다. 국가를 위해 적과 용감히 싸우다 생명을 바친 영웅들을 위한 추모식 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을 통해 살아있는 자들이 전사자들을 위해 추모하는 일은 “당연한 의무”라고 했다. 이어 “세계는 우리들이 여기서 하는 말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을 것이지만, 전사자들이 여기서 희생한 일 만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말미에서 장병들의 희생으로 새롭게 태어난 “국민의 정부,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으로부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링컨이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강조한 대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는 살아있는 자로서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그 ‘당연한“ 참수리 전사자 영결식을 보이코트 함으로써 대통령으로서 의무를 유기했고 한국인이기를 포기했다.

링컨의 연설대로 조국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전쟁 영웅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6.29 연평해전 전사자들을 하루 빨리 잊어버리도록 하기 위해 영결식을 축소시켰고 적과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영웅들을 죄인 다루듯 했다.

6·29 연평해전 당시 사상자를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했던 이봉기 군의관이 10년 후 터트린 분노가 김대중 정권의 이적행위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 군의관은 전역 후 강원대 심장내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이 교수는 지난 6월 26일자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대중 정권은 “사건 당시 전사자 빈소에 일반인들조차 조문 못하게 막았다.”며 분노했다. 그는 또 “나라를 지키다가 젊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데, 국군 통수권자(대통령)는 축구 본다고 일본에 가서 웃으며 손 흔들고 이러면 어느 누가 나라를 지키겠나”며 통탄했다.

링컨 대통령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사자들을 최고의 영웅으로 받들어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끓어오르게 했고 링컨 자신에 대한 존경심도 두텁게 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전사한 영웅들을 남의 집 죽은 개 쳐다보듯 했고 천덕꾸러기로 내몰았다. 그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김정일을 섬긴 것이다. 링컨이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데 반해, 김대중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신받는 대통령으로 전락된 연유들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