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치권에 제2의 ‘문화혁명‘ 바람을 일으키고 다니던 보시라이(簿熙來) 충칭(重慶)시 서기가 지난 3월 갑자기 해임돼 연금되었다. 그의 처 구카이라이(谷開來)는 재산관리 문제로 영국 기업인 닐 헤이우드를 독살한 혐의로 8월 20일 사형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사형 집행유예는 행형 성적이 좋으면 무기 또는 유기 징역에 처하는 중국 특유의 제도이다.

53세의 보시라이 서기는 마우쩌둥(毛澤東)과 함께 공산주의 혁명 영웅들 중 하나였던 보이보(簿一波)의 차남이다. 그의 아버지는 1960~70년대 문화혁명 당시 수정주의자로 몰려 홍위병들에 의해 구타당하며 지방의 공장 노동자로 쫓겨났고 어머니는 핍박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아들 보시라이도 18세의 나이로 감옥에 갇혔고 맨발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그러나 마우쩌둥이 사망하자 보시라이 아버지 보이보는 중국 ‘8인의 불사신’으로 복권돼 1979년 부총리에 올랐으며 보시라이는 아버지 덕으로 ‘붉은 귀족’의 가문이 되어 승승장구 했다. 그는 역시 ‘붉은 귀족’ 출신 변호사 구카이라이와 결혼했다. 52세의 구카이라이는 중국 최고의 변호사로 손꼽혔다. 그 녀 또한 문화혁명 때 아버지가 수정주의자로 몰리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기차 안에서 물건을 팔고 벽돌 조적공으로 일하며 연명해갔다.

하지만 마우쩌둥 사망 후 보시라이는 다렌(大連)시장, 라오닝(遼寧)성 성장, 중앙정부의 상무부장(장관), 등을 거쳐 2007년 12월 인구 3000만 명의 충칭 시장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냉혈 동물이다. 한 밤중에 직원들을 사무실로 소집하는가 하면, 부하들에게 폭언폭행을 일삼아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 업적을 드러내기 위해 덩샤오핑(鄧小平) 실용주의로 빚어진 부작용들을 비판했다. 사회주의적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 낙오된 빈민과 빈부격차 해소 그리고 부패 척결 등을 극렬하게 공격했다.

보시라이는 부패척결 운동을 벌이며 사유화된 기업들을 다시 국유화 했고 부패관료들을 닥치는 대로 처단해 버렸다.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며 마오쩌둥 시절의 혁명가요를 부르게 했다. 홍위병의 ‘문화혁명’을 연상케 했으며 ‘신(新) 마오쩌둥주의’ 또는 ‘신좌파’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자유화와 개방화의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작태였다.

결국 보시라이의 과욕은 끝내 화를 자초했다. 그의 ‘신좌파’노선은 중앙 정부의 비위를 거슬리기에 족했다. 뿐 만 아니라 그의 부하들에 대한 냉혹한 처단은 부하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여 반기를 들게 했다. 또한 보시라이의 형, 여동생, 처형 등은 1억6000만 달러나 축재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보시라이에게 반기를 들고 나선 사람은 그의 최측근인 충칭 시 경찰총장 왕리쥔(王立軍)이다. 왕리쥔은 보시라이 가족의 비리와 처 구카이라이의 영국인 독살혐의 자료를 들고 지난 2월 6일 미국 영사관으로 뛰어 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 그가 망명키로 결심한 것은 자신도 보시라이 부하들처럼 처단될 수 있다는 공포심에서였다. 실상 왕리쥔의 부하 5명은 보시라이 측에 의해 비밀리에 체포되었고 그들 중 2명이 고문으로 숨졌으며 그의 운전사 마저 행방불명되었다. 왕리쥔의 폭로로 보시라이 부부의 치부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보시라이 부부의 몰락은 중국 ‘붉은 귀족’의 성장과 냉혹한 몰락 과정 엿볼 수 있게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출세를 위해 주변 사람들을 가혹하게 짓밟는 자는 자신의 종말도 참혹하게 끝나고 만다는 교훈도 남겼다. 보시라이 부부는 과욕으로 자멸의 묘혈을 팠다. “논과 밭은 잡초가 망치고 사람은 과욕이 망친다”는 옛 금언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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