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세탁 실태


자신의 경력을 위조하거나 원적에 남아 있는 이혼전력을 삭제하는 등 위조 증명서를 통한 신분 세탁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충북 청주 흥덕경찰서는 지난 20일 위조 증명서를 사용한 혐의로 의사·학원강사·방송작가·지역 일간지 간부 등 120여명을 입건했다고 밝혔다. 입건된 이들은 현재 대부분 혐의를 시인한 상태로 경찰은 수일 내로 이들에 대해 구속조치를 취할 방침이다. 그동안 각종 증명서 위조사범이 적발된 사례는 많지만 이처럼 위조를 의뢰했다가 무더기로 경찰에 적발된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이는 위조실태가 이미 심각한 수위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에 이번 사건을 통해 위조 공화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우리나라 신분세탁의 실태를 파헤쳐보았다.


“위조지폐를 제외한 모든 것을 위조해 드립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캐나다, 중국, 일본 그리고 유럽 각국의 증명서 위조도 가능합니다. 주문만 하시면 하루 안에 결과물을 볼 수 있습니다. 카드형 신분증 위조도 가능하고 바코드도 그대로 재현해 드립니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들어간 증명서 위조 관련 카페에 남겨진 글이다. 이 글 밑에 달린 댓글을 살펴보면 가격에서부터 위조가 가능한 증명서 종류 등에 이르기까지 각종 질문들로 가득하다. 심지어 출입국 기록 증명서를 위조해 줄 수 있냐는 질문도 올라와 있었다.
또 이 카페에는 실력있고 믿을 만한 업자나 그런 업자를 연결시켜 줄 만한 브로커를 찾는다는 글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한 회원은 “정말 실력있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저렴하면서도 똑같이 만들 수 있는 업자를 찾습니다”라는 글을 올려놓았는데, 그 아래에는 “먼저 어떤 증명서를 위조하려하는지 알려달라”, “저렴하면서도 어떤 증명서든 100% 똑같이 만드는 업자를 알고 있으니 따로 연락하라”는 답변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이에 반해 또 다른 한 카페는 경찰의 단속을 의식해서인지 비밀스럽게 운영되고 있었다.
이 카페의 회원 수는 무려 2,000여명에 달했으나 게시판 등에 남겨진 글은 회원 수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회원들이 이메일이나 쪽지와 같은 기능을 이용해 암암리에 정보를 교환하기 때문이다.
이 카페의 이용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회원 중 한명에게 쪽지를 보내 카페의 정보 교환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물어 보았다.
이 회원은 반나절 가량이 지난 뒤에야 답을 보내 왔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카페는 위조를 해 주겠다는 홍보성 글이 올라오면 카페 주인은 비밀유지를 위해 일단 삭제한 뒤 그 내용을 다시 회원들에게 전체 메일로 보낸다. 이렇게 전체 메일을 받은 회원들 가운데 위조증명서가 필요한 이들은 전체메일에 기재된 위조업자의 이메일로 각자 주문을 의뢰하는 것이다.

수능 성적표 위조 의뢰도
경찰에 따르면 위조 증명서를 원하는 수요층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주로 직장인이나 자영업자들이 위조 증명서 제작을 의뢰했으나 이제는 대학생뿐 아니라 고등학생들도 위조 증명서 제작을 의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고교생들 가운데는 수능 성적표도 위조하다 적발돼 놀라움을 더하고 있다.
이런 실태는 이번 무더기 적발 건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천안의 모 고교에 재학중인 조 모(18)양과 김 모(18)양 등은 인터넷으로 위조업자와 접선, 주민등록증 위조를 의뢰했다.
경찰에 따르면 친구사이인 조양과 김양은 2005년 12월 중순경 친구 생일에 나이트클럽을 가고 싶었으나 나이가 어려 입장이 거부되자 이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또 김 모(16)군은 2006년 1월 중순경 오토바이를 타고 싶어 오토바이 면허증을 위조하려 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더불어 대학생의 경우 한 모(23·여·대학생·경기 군포)씨가 성적증명서를 위조해 경찰에 검거됐다. 한씨는 2006년 7월 초순경 부모가 일정 학점이상 취득하여 졸업을 하면 유학을 보내준다고 한 것에 대해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에 범죄의 유혹에 빠진 것으로 밝혀졌다.
또 지방대에 다니다 일류대학교 의과대학 학생증을 위조하여 과외를 한 대학생도 덜미를 잡혔다. 경찰조사결과 대학생인 이 모(24·여·대학생·광주)씨는 개인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려했으나 수강생이 없자 위조업자에게 35만원을 주고 가짜 일류대 의대생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조 증명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실물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로 유사할까.
경찰에 따르면 위조 작업은 주로 중국현지에서 이뤄진다.
경찰 관계자는 “중국에는 위조가 보편화돼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위조하는 곳이 많다”며 “이 가운데 일류급 기술자도 상당수다. 그들은 저렴한 가격에 실물과 똑같은 위조 증명서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전 세계 위조시장의 메카로 불리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중국은 위조의 매카
이어 이 관계자는 “중국 베이징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에는 각종 증명서를 위조해 주는 곳이 수십 군데가 넘는다”며 “한국에서 위조를 해 준다는 업자들은 대부분 브로커들로 이들은 중국내 위조업체와 연결해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전에는 여권이나 각종 증명서류를 위조하는데 많은 돈이 들었을 뿐 아니라 업자를 만나기가 힘들었지만 이제는 쉽고 저렴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어 위조문서가 범람하고 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위조여권도 판을 쳐 은행권에서는 여권을 신분증명서로 인정하지 않은지 오래다.
중국 위조 업체들은 규모도 다양하다. 기술자가 3~4명인 곳에서부터 100여명에 이르는 곳까지 다양하다. 이곳에서 위조증명서나 신분증 등은 거의 못 만드는 것이 없다.
중국 현지소식통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위조 업체에는 세계 각국의 면허증, 여권, 신분증, 학생증 등등 온갖 증명서를 데이터화해서 보유하고 있다. 데이터에 없는 증명서에 대한 주문이 들어 올 경우 수일 내로 찾아 그것과 똑같이 만들어 준다. 이 정도면 거의 첩보영화 수준이다.
놀라운 것은 이뿐 아니다. 관공서에서 신분증이나 증명원 발급시 사용하는 각종 기계들까지 갖춰놓고 영업을 하는 곳도 있다. 이런 곳에서는 인감증명에서부터 원적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위조할 수 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각종 사기사건에도 중국제 위조 증명서가 단골처럼 등장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번 사건에서 덜미를 잡힌 위조업자 역시 억대 사기 사건에 얽혀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번에 검거된 위조업자 고 모(38)씨가 최근 충북 청원군에서 있었던 30억원대 토지사기사건에도 연루된 사실을 확인하고 관련 수사를 병행할 계획이다.
인감증명, 주민등록증, 등기부등본 등 토지거래에 사용된 서류 중 일부가 가짜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처럼 공공기관에서 발행한 공식문서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최근에는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한편 경찰을 비롯한 정부당국은 위조 문서가 늘어남에 따라 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이를 위조하는 기술력 또한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위조업자와 단속 당국 간의 쫓고 쫓기는 지루한 싸움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중국 내에서 위조되는 문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며 “최근에는 지폐와 같이 가늘고 얇은 필름을 삽입하는 등 첨단 기술을 동원해 각종 증명서를 제작하는 방법도 검토 중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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