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소송 끝에 아들 무죄 밝혀낸 아버지


살인 누명을 뒤집어쓴 한 국가대표급 태권도 선수 장일태씨(32)의 아버지 장윤곤(65)씨가 집요한 추적과 끈질긴 소송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려 11년 8개월여 만에 이뤄낸 ‘쾌거’다. 장씨는 “동료의 폭행사건에 휘말려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망친 내 아들의 무죄를 증명해내고 싶었다”며 “이를 위해 20년 몸담던 사업도 접고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는 데만 올인해 왔다”고 밝혔다. 이어 장씨는 “단 1분여 만에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10년 이상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며 그간 복받쳤던 설움과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1995년 사건 발생 이후 최근 무죄 판결이 나기까지, 한시도 제대로 눈을 붙일 수 없었다는 장씨. 대체 장일태씨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던 것일까. 지난 20일 오후 7시, 일산 호수공원 인근에 위치한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무죄임이 입증되던 날, 일태와 부둥켜안고 그토록 서글피 울 수가 없었다.”
2006년 12월 14일은 적어도 장씨에겐 ‘역사적인 날’이나 다름없다. 11년간 통한의 눈물로 밤을 지새오며 물질과 시간, 온갖 열정을 다 쏟은 결과, 아들의 무죄가 밝혀진 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군분투해왔던 ‘목표’를 달성해서일까. 장씨는 “진실이 밝혀져 마음이 벅찰 정도로 기쁘다”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진실이 진실로 밝혀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장씨가 12년 동안 집념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뒤풀이’가 발단
사건의 발단은 지난 1995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은 한국체대 태권도부 학생들이 국기원에서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뒤, 뒤풀이 모임을 가지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국가대표 선발자 축하 및 탈락자 위로’ 명분으로 모인 이날 모임은 1차, 2차로 이루어졌다. 장일태씨를 비롯해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된 이모(31)씨, 유모(31)씨 등 한국체대생 9명과 유씨의 여자친구 3명이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
1차는 강남에서 오후 5시부터 시작됐고, 술자리는 다음날 새벽 1시 30분까지 이어졌다.
문제가 발생한 자리는 2차 술자리.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이씨와 유씨가 다른 테이블에 있는 문상객들에게 시비를 걸어 옥신각신하다 패싸움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장일태씨는 이미 1차 술자리서 소주 10병을 마시고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만취했다.

경찰 초동수사가 ‘옳았다’
태권도 국가대표급 선수는 혼자서 일반 청년 4~5명 정도는 거뜬히 대결할 수 있다는 게 태권도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따라서 피해자인 문상객들과 태권도국가대표선수급인 이씨, 유씨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실제로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서초경찰서 김동구 형사(현용산경찰서)는 “싸움은 단 1분여 만에 종결됐으며, 피해자들은 현장에서 ‘KO’ 된 것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
서초경찰서 초동수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이씨는 피해자의 어깨를 손으로 잡고 있고, 유씨가 주먹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때리고 발로 가슴을 찼다. 피해자가 머리를 부딪치면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두 사람은 경찰이 올 것을 우려해 도망가, 싸움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 같은 폭행사실에 대해 이씨와 유씨는 경찰에서 자백했고, 포장마차 주인 등 목격자와 증인들의 신문 결과도 모두 일치해 이씨와 유씨가 명백한 폭행자임이 드러났다. 이렇게 이씨와 유씨는 구속될 위기에 처하게 됐고, 장일태씨는 무혐의 처리를 받았다.

피해자 사망하자 말 바꿔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데서 갑자기 불거졌다. 이씨와 유씨로부터 폭행을 당한 후 뇌사 상태에 빠진 피해자가 3일 만에 사망하면서 가해자 및 증인들 모두 말을 바꾸기 시작한 것. 심지어 일부 피해자들은 검찰조사와 재판과정에서 “장일태씨가 (폭행사건 사망자를) 때려 넘어뜨리는 바람에 사망했다”고 경찰조사 때와 다른 진술을 해, 사건은 점점 수렁에 빠졌다.
이렇게 해서 경찰 초동수사에서 밝혀진 사건의 진상은 검찰의 마지막 조사와 1심 재판 과정에서 ‘확’ 바꿔진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씨와 유씨의 가족들은 자기네 아들의 혐의를 줄이기 위해, 만취 상태로 당시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장일태씨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
뿐만 아니라 검찰조사를 대비하여 증인들과 말을 맞추고, 사전에 모의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장씨는 “물론 돈의 유혹, 남자친구의 신변 보호 등 갈등이 있을 순 있겠지만, 이것이 무고한 사람의 인생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셈이 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진실 추적’
장씨는 “이 때문에 일태가 충격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눈물이 난다”며 인터뷰 도중 가슴을 쥐어뜯기도 했다.
실제로 검찰과 법원의 오판으로 장일태씨는 한강 투신을 시도했다가 낚시꾼들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장씨는 20년 이상 몸담은 사업을 정리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먼저, 장씨는 가해자, 피해자, 목격자 증인 등을 찾아다니며 “제발 진실을 밝혀 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고 한다. 그는 “이 같은 진실싸움은 수렁에 빠진 자식을 건져보겠다는 단순한 핏줄의 정을 넘어, 진실과 정의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된 몸부림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검찰 조사결과 장일태씨를 둘러싼 음해와 증인들의 증언은 모두 ‘거짓’임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증인들은 ‘양심선언’을 해주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일조했다. 검찰은 뒤늦게 거짓 증언을 한 피해자들을 위증죄로 기소했고, 대법원은 이들에게 유죄를 확정했다.

양심선언으로 ‘무죄 입증’
장씨는 아들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재심을 청구, 위증을 한 피해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양심선언을 한 증인들을 ‘봐주는’ 넓은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1년 간에 걸친 장씨의 싸움은 결국 ‘값진’ 진실을 밝혀냈고, 아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한편, 장일태씨는 작년에 칠레에 건너가 현지 태권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명까지 거론되며 칠레 일간지에 실리자, 그는 또 한번 ‘자격 박탈’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고. 전해진다. 이에 대해 장씨는 “겨우 맘 잡고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가려는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개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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