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주의보’…각 캠프 전략 마련 ‘고심’

▲ 지난 4일 대선후보 첫 TV토론이 열린 가운데 진보통합당 심상정(좌부터), 민주통합당 문재인,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토론에 앞서 손을 맞잡고 있다.<사진=정대웅 기자>

[일요서울ㅣ정찬대 기자] 지난 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로 열린 대선후보 첫 TV토론회 이후 정치권 안팎에서 거센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의 파상공세에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방어하는데 급급했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존재감을 상실했다. 당초 예상했던 ‘朴-文’ 대결은 이뤄지지 않았고, ‘박근혜 저격수’를 자임한 이 후보의 공세는 상당수 유권자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각 캠프에서는 ‘이정희 주의보’가 내려지면서 앞으로 있을 2, 3차 방송토론의 전략수정이 불가피한 상태다. 곳곳에선 재질문 없는 현재의 토론방식을 개선하고 유력후보 간 맞대결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朴 ‘방어 급급’ 文 ‘존재감 상실’ 李 ‘막말 공세’

“나는 잃을 게 없다”(이정희 왈), “나는 읽을 게 없다”(박근혜 왈), “나는 낄 데가 없다”(문재인 왈). 지난 4일 열린 대선후보 첫 TV토론과 관련, 누리꾼들이 인터넷상에 시청소감을 올리면서 화제가 된 말이다.

1차 토론회에서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며 맹공을 퍼부었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박 후보는 “이 후보가 작정한 것 같다”며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이 후보의 공세에 문 후보는 묻혔고 그의 존재감은 사라졌다.

토론회 이후 각 캠프에서는 상반된 결과를 내놓으며 자당 후보의 선전을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속내는 복잡하다. 특히 박 후보와 문 후보 측은 돌발변수로 떠오른 이 후보에 대한 전략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 후보의 막가파식 네거티브 공세에 ‘대세 굳히기’를 꾀했던 박 후보 측과 ‘지지율 반등’의 계기로 삼고자 했던 문 후보 측 모두 차질을 빚으면서, 박 후보는 막말에 대한 부담감 해소를, 문 후보는 존재감을 살려야 하는 문제가 향후 과제로 떠올랐다.

눈치 보는 文… 존재감 상실

상당수 정치평론가들은 1차 TV토론의 가장 큰 피해자로 문재인 후보를 지목하고 있다. 이 후보는 작정하듯 박 후보를 겨냥했고, 박 후보는 토론회 내내 방어 자세를 취했다. 문 후보는 그 사이에서 존재감을 잃었고, 특히 일부 시청자들로 하여금 문 후보와 이 후보가 한편이라는 시각까지 심어줬다는 점에서 관전평이 좋지 않다.

신율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 5일 [일요서울]과 전화통화에서 “문 후보는 지난달 ‘단일화 토론’에서 안철수 전 후보에 대한 공세로 역풍을 맞기도 했다”며 “그 때문에 네거티브 공세를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어제 토론은 밋밋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정희 후보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각을 세웠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며 “토론회를 본 시청자들은 문재인, 이정희 후보가 친하다는 인상을 가질 수도 있다. 같은 동료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 후보의 가장 큰 고민은 두 후보에 대해 확실하게 각을 세움으로써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며 “본의 아니게 문 캠프가 ‘이정희 비상’에 걸린 상황이 됐다”고 분석했다.

‘다카키 마사오’와 ‘6억 원의 진실’

‘박근혜 저격수’로 나선 이 후보는 새누리당과 박 후보의 측근비리는 물론 그의 아버지인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각과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6억 원을 언급하며 사회 환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 후보는 이날 토론회에서 “충성 혈서를 써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것이다”며 “한국 이름 박정희, 해방되자 군사쿠데타로 집권하고 한일협정을 밀어붙인 장본인이다”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쓰던 돈이라며 박 후보에게 6억 원을 주지 않았느냐. 당시 은마아파트 3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추궁했다.

이에 박 후보는 “당시 아버지가 흉탄에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과 살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배려 차원에서 준다고 했을 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받았다”고 인정한 뒤 “나중에 다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대답했다.

다음날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주요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6억 원은 대선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또 다른 쟁점으로 급부상했다.

2·3차 토론 앞두고 전략 수정

중앙선관위 주관으로 열리는 대선후보 TV토론은 모두 세 차례 진행된다. 지난 4일에 이어 10일과 16일 각각 진행되는 토론회에서 박근혜, 문재인 후보 측은 ‘이정희’라는 돌발변수를 맞아 전략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박 후보 측은 문 후보를 유력 경쟁자로 설정했던 전략을 수정해 문 후보와 이 후보를 한데 묶어 공략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특히 문재인-이정희 후보를 같은 편으로 엮어 박 후보가 두 사람의 공세에 희생양이 된 것처럼 역이용, 이를 통해 ‘박근혜 동정론’이 일도록 함으로써 보수층을 결집한다는 계산이다.

문 후보 측도 전략수정에 고심하고 있다. 1차 토론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 점이 지적되면서 2, 3차 토론에서 ‘존재감 부각’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캠프 관계자들은 “문 후보의 존재감을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문 캠프의 TV방송토론팀 한 관계자는 지난 6일 본지와 전화통화에서 “이정희 후보가 또 다른 변수가 됐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 후보와 선을 그어야 한다는 주장부터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며 “그러나 먼저 선을 긋기도 쉽지 않다”고 전했다.

한편, TV토론 이후 곧바로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 후보의 지지율은 상승한 반면 문 후보의 지지율은 하락한 것으로 조사돼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5일 실시된 리서치앤리서치·한국리서치·리얼미터 여론조사를 종합해 평균값을 낸 결과 박 후보는 문 후보와의 양자대결에서 46.1% 대 41%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TV토론 결과 전반적으로 보수층의 결집과 진보층의 이완이 눈에 띈다”고 진단한 뒤 “이 후보의 과도한 공격이 본인에게는 미세한 상승효과를 보여줬지만, 문 후보 지지율은 오히려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이 후보의 지지율은 박 후보의 지지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문 후보에게 향할 지지율 일부를 끌어온다는 점에서 민주통합당의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문 캠프 내에서 “이 후보와 선을 긋고 토론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받고 있다.

<정찬대 기자> minch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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