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패 잡아도 ‘속수무책’

지난해 12월 30대 후반의 한모씨 등 2명과 도박판을 벌이게 됐다는 자영업자 오모씨.서울 금천구 시흥동 주변에서 음성적으로 행해지던 도박판에 전전하면서 이들의 ‘하우스(도박장)’ 출입은 시작되었다. 자신의 말로 ‘한 노름’한다는 오씨는 단연 자신이 그 날 돈을 ‘싹쓸이’를 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오씨는 가지고 있는 카드 4장으로 승부를 내는 이 게임에서 상대방을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패를 가지고 있어도 번번이 패하기는 마찬가지. 이렇게 해서 오씨는 12일 오후 8시부터 시작된 도박판에서 약 5시간 동안 무려 1,000만원이나 잃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씨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 만무했다. 이들은 같은 달 28일 같은 장소에서 또 판을 벌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도박장에서 오씨는 도박으로 거의 매일 수십~수백 만원씩 돈을 따거나 잃거나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서서히 헤어날 수 없는 도박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해서 오씨가 세 차례에 걸쳐 잃은 돈은 총 1,180만원에 이르렀다.

지난 1월 서울 이남지역에 사는 주부 김모씨도 사기도박의 또 다른 피해자. 김씨는 도박으로 인해 전재산을 탕진했다. 자신의 명의로 된 모든 것은 다 팔았다. 이렇게 도박으로 쏟아 부은 돈은 총 5억여원. 집 2채를 팔아넘긴 값이었다. 그러나 애시당초 오씨와 김씨가 도박판에서 돈을 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상대방들은 형광물질로 표시된 목카드와 표시를 식별할 수 있는 콘택트렌즈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자신의 경험담을 밝힌 오씨는 “한씨 등의 ‘귀신같은 도박 실력’에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음을 느꼈다. 분명 ‘고수’와는 다른 무엇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하우스에서 상대방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치려하지 않았다”며 그들의 특수렌즈 속임수에 분개했다. 위의 사례들에서 보듯 최근 이 같은 유형의 범죄를 찾아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예전에는 소위 ‘꾼’끼리 암암리에 도박판을 벌여왔지만, 요즘은 자영업자나 주부 등을 상대로 도박판에 끌어들여 ‘사기’를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도박 장비 팔아 25억원 챙겨

서울 경찰청은 23일 이같은 사기도박용 특수카드와 콘택트렌즈를 제조해 한씨 등에게 판 김모(남·49)씨를 의료기기법 및 상표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 등 5명은 지난해 2월부터 경기도 포천의 한 공장에서 사기도박용 카드와 콘택트렌즈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켜 왔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형광물질이 색맹색약 보정용으로 쓰이는 특수 콘택트렌즈에서만 보인다는 점을 악용, 이를 제조해 비싼 값에 팔아넘긴 것이다. 이들이 만든 사기도박용 카드는 5만8,000목, 특수 콘택트렌즈는 1만쌍에 달했다. 이 가운데 카드 3만목과 콘택트렌즈 5,000쌍이 시중에 유통(카드 12목 + 콘택트렌즈 2쌍 = 1세트, 세트 당 100~300만원)돼 25억원 상당의 부당 이익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들 장비가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조사결과 이들은 전문 사기도박꾼인 일명 ‘타짜’나 ‘도박판’에게 거액을 탕진하여 자산회복을 노리는 상습도박자 등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장비만 사용하면 도박판에서 단번에 거액을 딸 수 있다’고 현혹해 구매하도록 한탕주의를 조장했다. 또 판매 전에 실제 판매할 콘택트렌즈에 착색된 것과 동일한 물질이 착색된 안경을 구매자로 하여금 착용해 보도록 함으로써, 육안으로는 식별되지 않지만 착용 시에는 카드 뒷면에 표시된 형광물질이 식별되는 것을 확인시키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기도박이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심적 확신’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유통알선조직도 등장

문제는 사정이 이러한데도 이들을 적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서울지방경찰청 외사3계에서는 “이들은 자신이 상대하는 특정 거래자 외에는 직접적 거래를 삼가 거래 커넥션 및 판매망이 쉽게 드러나는 것을 방지했다”며 “거래장부나 연락처 등을 일체 남기지 않으면서 현금으로만 거래해 경찰 수사에 어려움이 따르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경찰은 “실체가 은닉되고 있는 만큼 거래규모는 훨씬 방대하고 피해자도 엄청날 것”이라며 “하우스에서 전문적으로 사기도박용품을 공급하면서 사기도박을 알선할 가능성이 높아 이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수사를 할 예정”이라고 향후 수사방향을 전했다. 한편 경찰은 “이들은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물건이 유통될 시 전문 사기도박꾼에게 걸릴 것을 우려, 그 주변의 일반카드 및 화투 등을 모두 사들인 뒤 자신들의 물건을 유통시켰던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들의 교묘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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