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 종사자임을 사칭해 여성들에게 금품을 갈취하고 성관계까지 맺은 일당이 경찰에 구속됐다. 이들 일당은 해당 직업의 복장을 구비한 것은 물론, 전문 용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치밀하게 사기행각을 준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추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조사에 착수했다.공군 파일럿과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로 자신의 신분을 속인 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여성들에게서 금품을 빼앗고 성관계를 가져온 김모(48·무직)와 이모(27·무직)씨의 사기행각이 피해 여성의 신고로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고향 선후배 사이인 이들 일당이 만난 것은 지난 2003년. 주범 김씨는 인터넷 채팅 사이트에서 알게 된 후배 이씨에게 “좋은 돈벌이가 있다” 고 권유했고, 이씨가 이를 즉각 수용해 범죄 모의가 이뤄지게 됐다.이미 신분위장으로 사기행각을 저지르고 있었던 김씨는 후배 이씨에게 자신의 ‘노하우’ 를 전수해주고, 이씨는 추후 획득한 수입의 일부를 김씨에게 주는 조건으로 이들 일당의 사기행각은 시작되었다.

이들은 충남 천안에 거처를 마련하고 용모와 말투에서부터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까지 습득하는 등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김씨 일당이 범행 대상으로 삼은 여성들은 결혼 적령기에 있는 25세에서 30대 중반까지의 미혼여성들. 그 중에는 대기업에서 일하는 회사원이나 교사 등 ‘커리어 우먼’ 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들은 인터넷 채팅 사이트나 미팅 사이트에서 여성들에게 접근한 후 만남을 가졌으며 훤칠한 키와 서글서글한 외모는 물론 유머러스한 화술과 세련된 매너로 단번에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 이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여성들은 거의 없었다.

이들이 ‘전문직 종사자’ 로 완벽한 연기를 구사했기 때문이다.김씨는 의사 가운을 구입해 사진을 찍어두고 만나는 여성들에게 보여줬으며, 인터넷 신분증 위조 사이트에서 의대 졸업장과 의사자격증을 구입해 대학병원 전문의 행세를 해왔다. 특히 김씨는 여성들과의 대화시 의심의 소지를 없애려고 의학전문 서적까지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이씨도 공군에서 현역병으로 복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공군대위’ 행세를 하고 다녔다. 이씨 역시 군 복무당시 절도한 공군 파일럿 복장을 착용한 사진을 찍어뒀고 이를 여성들에게 보여주며 직업군인 행세를 하고 다녔다.이씨는 “훈련기간 동안 부대일이 바쁘다” 며 전혀 여성들을 만나지 않는 등 예전 군 복무시의 훈련일정을 토대로 완벽한 직업군인 행세를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여성들 대부분은 ‘매너좋고 직업좋은’ 1등 신랑감인 이들과 결혼을 약속했고 혼전동거에 들어간 여성들도 있었다.여성들의 신뢰감을 얻게 되자 김씨 일당은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 돈이 필요하니 빌려달라”고 하거나 “병원에 가야 하는데 진료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올 것 같으니 조금만 보태달라”고 하며 여성들에게 금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대부분의 여성들은 혼인을 약속했거나 동거 중이라 의심없이 돈을 건넸다. 이런 수법으로 김씨는 6,800만원, 이씨는 1,300만원 정도의 금품을 뜯어냈다. 목적이 달성되면 이들은 “일에 몰두하고 싶다”고 말하거나 사소한 문제로 고의적인 싸움을 자주 벌여 여성들과 헤어졌다. 김씨 일당은 사귀던 여성과 헤어지면 곧바로 또 다른 여성들을 만나 동일수법으로 금품을 뜯어왔다. 또,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김씨와 이씨는 서로 사귀던 여자를 바꾸기도 했다.그러나 이들의 사기행각은 결국 덜미를 잡혔다. 피해여성 중 한 명이 신용카드로 대금결제를 하던 중 당시 사귀던 김씨가 자기 몰래 카드를 사용한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정체가 탄로났다.피해자의 신고로 경찰은 김씨 일당의 정체를 파악하고 이씨를 구속하는 한편 달아난 김씨를 지명수배하고 추적에 나섰다.

경찰 조사에서 이씨는 “파일럿 복장을 한 사진을 보여주며 접근하니까, 여성들이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며 “여성과 성관계를 맺고 돈까지 뜯어내는 데는 보통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 만남에서 ‘모든 것’을 건네준 여성도 있다” 고 털어놨다.한편 이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관악 경찰서 담당자는 “김씨일당은 젊은 여성들이 전문직 남성을 배우자로 선호한다는 점을 노려 사기행각을 벌여왔으며 수려한 외모와 달변을 무기로 사용했다”고 언급하며 “성적 수치심으로 인해 피해사실이 알려지기를 꺼리는 여성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추가 조사를 벌일 계획” 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피해자 A양 “그는 내 모든 것을 가져갔다”

공군 파일럿으로 위장한 이씨의 사기행각에 철저히 농락당한 A양. 당시 이씨와 결혼을 약속해 다니던 직장마저 그만둔 A양은 자취방에서 충격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당황하던 A양은 이내 ‘그’ 에 대해 입을 열었다.

- 이씨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작년 봄 채팅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됐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욕설과 반말을 일삼는데 비해 이씨는 정말 매너가 좋았다. 이후 채팅방에서 몇 번 더 만났다.

- 이씨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계기는.▲채팅방에서 다른 남성과 시비가 붙었었는데 이씨가 잘 해결해 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 이씨가 파일럿 사진을 보여주며 한 번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다가왔는데 그에 대한 느낌이 싫지 않아 만남을 수락했다. 실제로 만나보니 채팅 때보다 훨씬 좋았다.

- 이씨와 결혼을 약속했었나.▲그렇다. 괜찮은 직장에 잘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적령기를 앞두고 많이 외로웠었는데 그만한 조건을 가진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객지에서 고생하는 것이 싫어 바로 혼전 동거에 들어갔다.

- 이씨를 의심해 본 적은 없나.▲그가 떠나기 전까지는 없었다. 그는 군 일과표에 맞춰 꼬박꼬박 출, 퇴근했고 언제 무슨 훈련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더구나 내가 군에 대해 전혀 몰라 더욱 의심하지 않았다.

- 현재의 심경은.▲죽고 싶다. 한 때는 나의 모든 것이었던 그가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원수가 되었다. 부모님 뵐 면목이 없어 고향집에도 못 내려간다. 모든 것을 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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