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2월 취임을 앞두고 청와대 비서진의 집무실 재배치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통령 집무실은 비서실장을 비롯한 보좌진들의 사무실과 무려 500m나 떨어져 있다. 비서관들은 청와대 경내에서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7~8분을 걸어야 하며 승용차를 이용해야 할 지경이다.

모든 조직체가 그러하듯 수장과 비서들의 방은 서로 가까이 붙어있게 마련이다. 213년 전 건축된 미국의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도 그렇다. ‘오벌 오피스(타원형 사무실)’로 불리는 대통령 집무실은 23평에 불과하고 3인용 소파 2개와 탁자 하나가 놓여있을 따름이다.

이 방 양쪽으로는 부통령실, 선임고문실, 비서실장실, 국토안보보좌관실, 대변인실,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경우도 통수권자와 보좌진들의 방은 가깝다.

미국 대통령은 비서관들을 집무실로 부르기도 하고 대통령이 옆방 참모들 방으로 찾아가 격의 없이 토론하거나 회의를 하기도 한다. 오벌 오피스는 대체로 문이 열려 있는 게 관행이라고 한다. 비서관이나 보좌진들이 언제나 들어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 집무실은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이다. 대통령은 참모들을 격의 없고 대등한 토론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 대통령은 보좌관들을 왕권체제의 임금님이 어전 회의 때 신하로 여길 정도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 자유민주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자유분방한 활기는 없다.

그밖에도 대통령은 외부로 나설 땐 요란한 사이렌으로 교통신호를 통제하고 차량들을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하며 일반 국민과 섞이기를 거부한다.

청와대 외곽 분위기도 위압적이다. 경복궁 지하철 역에서 효자동쪽으로 올라가면 끝머리에 청와대가 나타난다. 말끔히 정돈된 정원수들이 아름답기 그지 없으면서도 어쩐지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70여 년 전 일본 식민 통치 시절 총독부 분위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이다.

1940년대 초 나는 어린 소년으로 전차를 타고 효자동 종점에서 내려 지금의 청와대 자리인 총독부 근처에 갔던 기억이 난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총독부 관저 경내는 그 때도 아름다운 정원수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청와대 주인은 내가 뽑은 내 나라 대통령이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70여 년 전 내 백성을 짓밟던 총독부 시절의 그 으시시했던 분위기를 떨칠 수 없게 된다면 뭔가 잘못되었음이 분명하다.

미국 백악관의 일부는 일정한 시간대에 관광객들에게 개방된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흥미로운 보도를 접한 일이 있다. 백악관 관광에 들어갔던 한 관광객이 복도에서 길을 잃었다. 여기저기 헤매던 중 카터 대통령과 마주쳤다.

카터 대통령이 반갑게 맞이하자 그 낯선 객은 나갈 통로를 잃었다고 멋적어했다. 카터 대통령은 그 관광객을 친절하게 외부로 안내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한 “국민의 정부,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의 실체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선거 때면 “백성을 섬기는 종복”이 되겠다고 떠들면서도 청와대로 들어가게 되면 종복 아닌 제왕으로 군림한다.

박 당선인은 대선 때 백성과 소통하는 “민생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백성과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우선 청와대 참모들부터 가까이 재배치해 그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외부행사에 나설 때도 삼엄한 차량통제 보다는 국민과 함께 섞여 가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정부,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이며 “민생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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