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는 지금 무료 사우나의 계절이다. 연일 35~36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인해 사우나가 따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무더위는 중국대륙이 밑으로 꺼져 지상의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아직 버티고 남아 히죽거릴 정도로 많은 수의 중국인, 그 중국인들조차 자취를 감추게 할 정도이다.“뭐? 죽는다고? 그것도 일본×들한테?! 아이야오(중국인 특유의 감탄사), 일본×들, 여기서도 죽일 짓을 했구먼….“한낮의 땡볕이 가실 무렵, 잠옷차림(정말 잠옷차림으로 동네를 어슬렁거린다)으로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즐기는 한무리의 중국 아줌마들. “한류(韓流)에 대해 아는가?”라고 질문하는 기자에게 느닷없이 ‘명성황후’가 나중에는 죽느냐고 되물었다.

현재 중국TV를 통해 중국인 시청자의 시선을 놓아주질 않고 있는 TV드라마 ‘명성황후’를 보며 그녀가 나중에는 죽는다는 말을 들은터라 기자에게 그 진위를 확인하는 터였다. 이에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당한다고 하니 조그만 간이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내 던지는 한마디이다. 빨라진 부채질 탓에 팔꿈치의 살들이 요동치는 이 중국 아줌마, 결국 아무 관계없는 한류에 대한 질문에 애꿎은(?) 일본만 욕을 얻어먹으니 일본은 이래저래 어디를 가나 미움을 사고 있다. 여하튼 한류는 이렇게 중국의 여염집 아줌마들 사이로도 깊게 파고들고 있는 상태이다. 중국에서의 한류는 1997년, <사랑이 뭐길래>, <질투> 등의 한국 TV드라마 방영으로 형성되기 시작, 1998년 5월 H.O.T의 음반발매로 그 열기를 발산한다.

그러다가 1999년 11월 클론의 성공적인 공연으로 ‘한류’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됐고, 이를 2000년 2월 H.O.T가 또 한차례 폭발적인 공연을 하면서 드디어 중국대륙의 정점에 ‘한류’가 포진하게 된다. 그 이후 현재까지 적지 않은 한국의 TV드라마가 방영되었으며 최근들어 한류의 열기는 한국영화와 한국산 게임, 한국의 대중소설을 비롯한 한국서적으로까지 그 쟝르를 넓히며 중국대륙을 잠식하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한류의 자취는 중국의 도처에서 쉽게 감지된다.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에서도 거리의 포스터나 한국액세서리점, 한국식 뷰티숍, 한국식 카페 등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실제로 취재를 위해 상하이의 대표적 번화가 쑤지아후이(徐家匯)를 향하는 길목에서도 개업한지 한달이 채 안되었다는 ‘한국식 카페(한국식 자장면, 짬뽕, 비빔밥 등이 주메뉴)’를 볼 수 있었으며, 쑤지아후이 쇼핑가에서는 도착한지 20여분이 채 안되어 한국노래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노래가 다름 아닌 이문세씨의 ‘시를 위한 시’. 한국의 최신 대중문화로 시작된 한류가 이제는 한국의 추억의 문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안녕하세요. 나는 리쭌입니다.”중국하면 흔히 인민해방군이 강직하고 절도있는 자세로 팔다리를 쭉쭉 뻗어 늠름하게 행진하는 모습이나, 붉은 색 깃발과 치장이 휘황찬란한 베이징의 거대한 인민대회당(국회)안으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입장하는 중국 지도자들이 연상된다. 하지만 이들만이 중국은 아니다. 중국에도 ‘노랑머리’, 즉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여느 자본주의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젊은이들이 존재한다.

한국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대학생 리쭌(李存·20세)도 그 중 한명이다. 한 음반매장에서 CD와 비디오를 고르고 있는 그를 우연히 만나 한류에 대해 몇마디 주고받았다.“나는 한류에 목숨을 걸었어요. 한국문화, 멋있어요!” 그에 의하면 한류는 이제 중국인, 특히 자신과 같은 젊은 층에서는 확실한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새로운 한국 영화나 음반이 나올라 싶으면 누가 먼저 구입하는가 내기도 벌인다는 것이다. 이를 감상한 뒤 친구들 사이에서 평가회(?)를 하는데 여기에서는 영화나 음반의 내용뿐만 아니라 주인공, 혹은 가수의 패션 등에 대해서도 저마다의 일가견을 늘어놓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묘한 경쟁심리가 작용, 너도나도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니 자기의 머리 염색과 한국어 공부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또한 한 한국영화에서 본 여주인공의 액세서리와 비슷한 것을 여자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이 친구, 인터뷰를 마치고 무엇을 고르나 보았더니 한참을 뒤지다가 결국’대장금’ 비디오를 선택하곤 씩 웃는다. “졸업해서 취직하면 여자친구와 한국으로 여행가기로 약속했어요.” 상하이 중심지로부터 약 40분 정도 떨어진 다소 허름한 곳. 하지만 여기서도 한류는 쉽게 발견된다. “한국DVD와 CD는 현재 가장 잘 나가는 품목이에요!”그 거리 한 모퉁이에서 각종 음반이나 영화의 비디오, DVD를 판매하는 노점상주인 위(兪·여)씨가 한국 DVD나 CD 판매추이를 묻는 기자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말한다. 그녀에 의하면 한국의 비디오나 CD, DVD는 아직 종류가 홍콩이나 미국 등의 그것보다 많지는 않지만 새로 입하되면 순식간에 팔려나간다고 한다. 지난 3월에 발매된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동이나 예약하며 기다린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반영하듯 매월 약 100만부 이상 판매된다는 음악월간지 <당대가단>이 얼마전에 조사한 ‘외국스타 인기순위’결과, 한국인 스타들이 7명이나 10위 권에 들어 인기를 독차지하다시피 하고 있다. 중국전역에서 이제 거의 안정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한류이기는 하지만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한 예가 중국에서 한류의 성공이 한국경제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태로는 중국에서 한류 덕 못봐요. 백날 해봤자 죽써서 남좋은 일 시키는 꼴을 면하기 힘들겁니다.”중국생활이 10년이 넘는다는 한 상사원 K씨의 말이다. 그는 중국에서의 한류가 한국에서 소위’대박’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원인이 몇 개 있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노점상이나 불법판매업자들의 존재라고 한다.

“한국도 아직 해적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중국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들은 정말 대담합니다. 우리가 이제 이들에게 뒷덜미 잡히고 있는것이라고 보면 돼요.”그에 의하면 중국은 명실상부한 따오판(盜版), 즉 해적판의 천국이다. “말만하면 즉시 만들어 준다”고 자랑하는 중국인들답게 어제 막 개봉된, 혹은 막 발매된 음반이 오늘이면 중국거리에서 매우 저렴한 가격에 고객들을 맞이하는 것이다.‘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도 한국에서 막 상영되기 시작한 시점에 중국어 자막까지 달린 채 버젓하게 길거리에 나왔는데 DVD의 거래가격은 대개 8위안(한국돈 1,200원 정도).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국대륙에서 한류가 뜨겁게 몰아친 지난 4년 동안 실제로 한국의 관련업계가 벌어들인 음반 인세수입 등은 고작 14억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현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개선점이라고는 중국정부에 지적재산권 보호에 대해 항의할 정도뿐이란다. 상황이 이러니 안타깝게도 한류는 우리에게 돌아오는 물적보상은 거의 없이 그렇지 않아도 잘 나가는 중국경제에 또하나의 불쏘시개가 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한국어 학습동기 한류 때문”

한류를 바라보는 중국인은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 스타들의 패션과 요란한 리듬에 맞춘 선동적인 몸동작을 모방하는 중국의 젊은세대들(중국에서는 이들을 힙한족(哈韓族)이라 한다), 그로 인한 학업소홀 등의 이유로 일부 기성세대들 사이에서는 한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중국에서의 한국어 학습은 단지 한류의 영향에 따른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 중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 한국인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수강생(134명)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배우게 된 계기와 이들의 연령층에 대해 조사한 것이 있어 참고로 소개한다.

먼저 한국어를 배우는 수강생들중 한국 드라마나 영화, 한국의 대중가요를 접한 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답한 사람은 단지 25~30%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한국어 수강생들이 전적으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경제의 발전과 이로 인한 한국기업으로의 취업, 한국으로의 유학 등의 이유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수강생들은 주로 20~30세 사이의 청년층으로 밝혀졌는데 주목할 점은 80% 이상이 대졸 이상의 학력을 소유한 엘리트라는 점이다.(참고로 중국에서 대학진학률은 10% 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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