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 따르면 사건의 발단은 3년여 동안 김씨와 박성희(가명· 29)씨가 지난해 9월경 헤어지면서 비롯됐다. 이들의 단란했던 동거생활은 김씨의 잦은 폭력과 의처증으로 인해 파국을 맞았다. 한 차례 이혼의 아픔을 겪었던 박씨는 비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김씨를 의지하며 생활했다. 그러나 김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난폭성을 드러냈다. 박씨의 직장일 등으로 귀가가 늦으면 ‘누구를 만나고 왔냐’는 둥 의심을 했고, 그 의심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주먹을 앞세우며 박씨를 몰아 붙인 것. 두 사람의 동거생활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고, 박씨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자신의 처지를 함부로 말하기 쉽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 직장 동료 이희선(가명· 29)씨에게 털어놨다.

박씨의 신세한탄이었지만, 이씨는 늘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 주었다. 결국 박씨는 힘겹게 지탱해오던 김씨와의 동거생활을 정리하고 지난해 10월경 이씨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박씨에 대한 집착이 무척 강했던 김씨는 박씨의 ‘절교선언’을 용납하지 않았다. ‘여전히 박씨를 사랑하고 있고 박씨도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직장까지 포기하고 박씨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미행했다.집요한 추적으로 박씨가 이씨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고, 박씨가 자신을 떠나게 된 원인이 이씨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김씨의 눈에 중성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던 이씨가 동성애자로 보였기 때문. 특별한 증거는 없었지만 온전히 그럴 것 같다는 김씨의 예감이었다. 그러나 김씨의 예감은 적중했다. 이씨는 동성애자였다.

이씨와 박씨가 고민을 주고받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스며든 것. 박씨는 이씨가 동성애자임을 알게됐고, 거부감이 들기보다 자신의 내면속에 동성애 기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들에게 ‘커밍아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이에 동거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씨는 동료들이 알게 될까봐 직장을 옮겼다. 하지만 김씨의 추적에 들키고 만 것. 김씨는 이때부터 이씨를 찾아다니며 “박씨를 다시 돌려달라”, “돌려보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때로는 사정했고, 때로는 협박하며 이씨를 협박했다. 그러나 이씨는 “박씨가 당신에게 가고 안가고의 문제는 본인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라고 김씨의 요구를 거부했다. 단순한 말에 그칠 김씨가 아니었다. 박씨와 이씨를 물고 끈질기게 늘어지며 김씨의 협박의 강도는 점점 더 거세졌다. 김씨는 박씨와 이씨가 함께 다녔던 직장에 찾아가 분풀이를 했다.

직장 곳곳에 “박씨는 여자끼리 연애를 하는 사람이다”“이씨는 가정 파괴범이다”라는 내용의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한 대자보를 붙이고 다닌 것. 김씨의 이같은 폭로는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40여 차례나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박씨와 이씨를 숨막히게 했던 것은 김씨가 직장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살고 있던 집 주변의 골목 곳곳에 같은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고 다닌 것이었다. 대자보를 보면 즉시 떼었지만, 이미 주변 사람들은 그 내용을 볼만큼 본 상황이었다. 박씨는 난감했다. 자기 때문에 이씨까지 상처를 입게 된 점이 괴로웠고, 헤어졌다고 생각한 김씨가 계속 자신의 주변에서 맴돌아 불안에 떨어야 했다. 또 ‘김씨가 언제 어느 순간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노이로제까지 걸린 박씨와 이씨는 늘 숨죽이며 지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집에 귀가하면 전등도 켜지 않은 채 암흑 속에서 생활했다.

김씨가 집으로까지 쳐들어올까 봐 전등을 켜지 않고 촛불을 켜고 생활한 것. 그것도 모자라 아예 창문의 틈은 검정 비닐로 모두 막아 두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김씨는 두 사람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줄로 알았다. 그러자 김씨는 황당했다. 박씨를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대자보를 더 많이 붙이고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하지만 김씨의 대자보 붙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박씨는 더욱 더 숨었다. 돌아올 것이라 여긴 방법이 단지 김씨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은둔생활은 점점 힘들어져 갔고, 그에 따른 괴로움도 커져만 갔다. 그렇다고 남자도 하기 힘든 커밍아웃을 선택하기란 쉽지않았다. 김씨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던 두 사람은 결국 마지막 희망으로 경찰의 힘을 빌렸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단순한 스토킹 혐의로는 피해여성을 구제할 길이 없다고 판단, 보다 확실한 증거를 찾아 김씨를 검거했다.

조사결과 김씨는 박씨와 이씨가 살고 있던 집 근처에 하숙집까지 얻어놓고 있던 상태였다. 또 방안에는 노트북과 프린터까지 마련돼 있었고, 앞으로 붙일 예정이던 대자보 내용이 줄줄이 컴퓨터에 저장돼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경찰을 섬뜩하게 만들었던 것은 김씨가 몸에 품고 다니던 신문기사 스크랩들이었다. 대부분 동거를 하다 헤어진 게 빌미가 돼 동거당사자를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내용의 범죄 기사였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은 “김씨가 무엇 때문에 그 기사 내용을 가지고 다녔는지 의심을 하지 않은 수 없었다”며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사건이 마무리된 게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피해 여성들은 “김씨가 돈을 요구하거나 다른 금전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며 “철창에 가두는 것보다 자신의 집착이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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