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육사·청와대·안기부· 중정·검사 출신

[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만사형통’(萬事兄通), 이명박 정권의 모든 인사가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을 통해야 한다는 말이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만사올통’이라는 말이 잠시 돌았다. 모든 일은 박근혜 대통령의 올케인 서향희 변호사를 통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이후 나타난 인사를 보면 ‘만사칠통’(萬事七通)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박 대통령의 원로그룹인 ‘7인회’를 뜻한다. 이들이 박 정권 핵심 요직 인사를 막후에서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돌고 있다. 본인들은 ‘위치에 있지 않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는 입장이지만 이를 믿는 인사는 여권내에서조차 찾기 힘들정도다. 7인회를 심층 취재했다.

7인회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대선전 박근혜 대표와 월1회 식사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다. 소문은 2012년 5월 중순 민주통합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존재 사실을 폭로하면서 세간에 구체적으로 알려졌다. 7인회는 박근혜 후보 막후에서 인사뿐만 아니라 정무적 조언까지 하면서 영향력을 끼치는 원로그룹으로 자리잡았다.

7인회에는 좌장격인 김용환(81) 새누리당 고문을 필두로 안병훈 기파랑 대표(75), 김기춘(74) 전 법무부 장관, 최병렬(75) 전 한나라당 대표, 김용갑(77) 전 의원, 현경대(74) 전 의원, 강창희(67) 국회의장으로 구성돼 있다.

‘7인회 논란’이 일자 2012년 대통령 경선과 대선때에는 이들은 ‘정중동’ 행보를 보였다. 재차 ‘박근혜를 움직이는 비선모임’으로 지목되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가 당선이 되고 대통령 취임식을 갖는 동안 이들은 자신들의 경력과 인맥, 그리고 파워를 활용해 박근혜 인선에서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 재차 나왔다. 특히 청와대와 장관 인선에 막강한 파워를 발휘하고 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감지됐다.

2007년 전면에서 2012년 물밑 '지원'
단초는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이 청와대 대변인으로 무난하게 입성하면서부터다. 윤 대변인은 박근혜 정권의 ‘불통의 대명사’로 알려질 정도로 논란의 한 가운데 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인수위 멤버중 가장 먼저 청와대 대변인으로 윤 대변인을 발탁했다. 모두 다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지만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 배경에 7인회와 친분이 청와대 입성에 한몫했다는 게 당내 정설이다.

윤 대변인의 청와대행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총리나 장관, 청와대 인선이 있을 때마다 7인회의 이름이 나왔다. 총리로 지명됐다 사퇴한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안병훈 기파랑 대표(서울고9회)와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라는 점에서 거론됐다. 유진룡(27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또한 선후배간 사이다. 같은 서울고 출신이라는 점이 단초가 됐다.

박흥렬 청와대 경호실장(육사28기)과 김병관 국방부 장관 내정자(육사28기),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육사27기), 남재준 국정원장 내정자(육사25기) 인사 뒤에는 육사 25기인 강창희 국회의장이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강 의장은 남 내정자와는 육사 동기고 남 내정자는 이런 인연으로 김 안보실장과 박 대통령을 연결짓는 ‘가교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안보실장은 박 경호실장과 김 국방부장관 내정자를 인수위에 데리고 와 ‘김장수 라인’을 형성한 장본인이다. 이래저래 강 의장의 휘하에 있는 육사 선후배 동기로 얼키고설켜 있는 셈이다.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의 경우에는 정홍원 국무총리와 경남중 선후배이자 검찰에서 근무할 때 정 총리를 부하로 데리고 있었던 연으로 거론됐다. 또한 검찰 출신인 황교안 법무부 장관 역시 같은 공안통으로 인사 막후에서 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시각이 대두됐다.

이처럼 청와대, 정부, 사정기관 요직에 본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7인회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7인회 당사자들은 ‘추천할 위치가 아니다’, ‘그런 일 없다’, ‘사실이 아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7인의 경력을 보면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인사가 속해있을 뿐만 아니라 멤버중 일부 인사는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시절 정치적 자문을 해줄 정도로 친분이 깊어 여권에선 박 정권 인사 개입 오히려 당연시하는 분위기다.

‘육사 천국시대’연 강창희 국회의장
실제로 지난 2007년 대통령 경선 당시에는 박근혜 후보를 적극적으로 도운 인사들이 바로 7인회다. 강창희.김용환 두 인사는 캠프 고문으로 활동했고 김기춘 전 장관은 선대위 부위원장, 안병훈 대표는 선대위원장, 최병렬 전 대표는 공동상임고문에 현경대 전 의원은 고문과 함께 친박 모임인 한강포럼을 주도했다. 김용환 고문 역시 박근혜 친목 모임인 ‘상록포럼’을 사실상 이끌며 적극 지원했다.

게다가 7인회 개인 이력을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1963~70년)과 딸인 박 대통령,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 등 군부정권에서 승승장구한 인사들이 상당수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좌장격인 김용환 고문은 1932년 충남 보령 출생으로 공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73년)을 거쳐 42세부터 4년간 재무부 장관(74~78년)을 지냈다.

13대부터 고향인 보령에서 내리 4선을 했다. 97년 대선 당시 DJP 연합을 성사시켜 김대중-김종필 공동 정권을 탄생시켰다. 김종필 전 총리가 내각제를 포기하자 이에 반발하며 99년 자민련을 탈당해 한국신당을 창당하고 대표를 맡다가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정가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생활 시절 ‘정치적 스승’ 역할을 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46년생인 강창희 국회의장은 대전고를 나와 육사에 입학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민정당 창당에 관여한 인물이다. 육사 출신으로 육군대학 교수로 있다가 1980년 신군부 집권 후 중령으로 예편, ‘하나회 막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민정당 조직국장으로 정계에 입문한 강 의장은 11, 12, 14, 15, 16대에 이어 19대 총선에서 대전 중구에 출마해 6선에 성공했다.

중앙정보부 김기춘 ‘유신헌법’ 초안
1995년 김종필(JP) 명예총재가 이끄는 자민련에 합류해 과학기술부장관을 지냈고, 2001년 자민련을 국회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여당인 민주당 의원 3명이 자민련에 입당하는 ‘이적파문’에 반발하다 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국회 재입성에 성공한 강 국회의장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충청도 공신으로 전반기 국회의장까지 맡아 박 정권과 의회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대표적인 7인회 인사다.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의 이력 역시 화려하다. 39년생인 김 전 장관은 경남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 광주지검 검사로 시작해 1974년에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을 맡았다. 전두환 정권에서도 중앙지검 공안부 부장으로서 명성을 날리며 승승장구했고 노태우 정권에선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이후 1996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시작해 내리 3선을 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 최고로 잘나가는 공안통이었다.

김 전 법무부장관은 1992년 대선을 임박해 지역감정을 조장해 여당 후보를 유리하게 만들려고 한 ‘초원복집’사건에 연루돼 기소됐다가 무혐의 처리됐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 플랜의 일환인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했고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에서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주역을 맡기도 했다.

안병훈 기파랑 대표 역시 박 대통령 부친과 인연이 깊다. 서울대 행정학과를 나온 그는 1965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를 했다. 이후 조선일부 정치부장(79년)과 편집국장(85년)을 거쳐 부사장까지 지냈다. 현재 뉴데일리 상남언론재단 이사장과 제4대 서재필 기념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38년 생인 최병렬 전 대표는 한국일보사(59년)에 입사해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를 하다 편집국장과 이사를 지낸 기자출신이다. 부산고-서울대 법대를 나온 최 전 대표 역시 박정희 정권에서 정치부 기자생활을 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당 12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15, 16대 금뱃지를 달았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문화공보부 장관, 노동부 장관을 거쳤다. YS정권에선 29대 서울시장을 역임했고 한나라당 부총재(98년)를 역임했다. 2004년초에는 야당인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노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했다.

박정희·전두환 청와대 근무 허실장 ‘주목’
36생인 김용갑 전 의원은 육사 출신이다. 박 정권 당시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전두환 정권 시절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거쳐 YS정권때에는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본격적인 정치는 96년 15대 국회의원으로 내리 3선을 했고 현재는 새누리당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39년생인 현경대 전 의원은 김 전 장관과 마찬가지로 박 정권 시절 검사 출신이다. 인천지검 검사(71년)를 시작으로 법무부에 근무하다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까지 마치고 민정당으로 11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정치권에 입문했다. 12, 14, 15, 16대 뱃지를 달아 5선을 했다.

현재 7인회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지만 여권내에선 박 정권 숨은 실세라는 점에 대해 토를 달지 않고 있다. 특히 허태열 대통령 비서실장이 7인회와 박 대통령간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허 실장 역시 박정희 정권 시절인 74년부터 청와대에서 일해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을 보좌했기 때문이다. 45년생으로 7인회 인사와 비교해 강 의장과 함께 막내뻘로 관계 설정에 따라 원로 그룹의 위상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허 실장은 70년도에 행시로 시작해 16,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부산고-성대를 나왔다. 최병렬 전 대표와는 고등학교 선후배 지간이기도 하다.
 
mariocap@ilyoseoul.co.kr

박근혜와 7인회 ‘부침사’
- 2004년 박근혜 시대 2007년 암흑기 거쳐…

박근혜 대통령이 잘 나가면 7인회 멤버들도 한 자리를 했다.

반면 암흑기에는 7인회 멤버도 어둠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7인회와 박 대통령 부침사는 박 대통령이 당 대표로 복귀한 2004년 부터다.

박 대표 시절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으로 김기춘 의원이 발탁됐다. 2007년 경선에서 떨어졌을 때 안병훈 대표는 찬밥 신세로 전락했고 현 전 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한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7인회의 암흑기였다.

그러다 다시 2012년 총선에서 박 대통령이 비상대책위 위원장을 맡자 강창희, 김용환 두 인사가 충청권에서 살아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강 국회의장은 새누리당으로 공천을 받아 국회의장이 됐다.

현경대 전 의원도 복귀해 공천권을 얻어 출마했다. 김용환, 김용갑, 최병렬 3인방은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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