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를 목적으로 특수훈련을 받던 훈련병의 애환을 그린 영화 <실미도>가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위장납북어선 문제가 불거져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위장납북어선 문제는 다소 생소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위장납북은 어떻게 이루어졌고, 또 납북된 뒤 이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 내막을 집중 취재했다. 위장 납북어선의 선장이었던 백평조(78)씨는 36년간 지켰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1965년 12월말 백평조씨에게 고향(경남 통영 욕지도)후배인 이모 소령(당시 해군 방첩부대장)이 찾아와 은밀한 제안을 했다. 이 소령의 제안을 듣고 백씨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소령의 제안은 바로 북한에 위장 납북되어 갔다가 돌아오라는 것. 북한에 가서 각종 지형지물과 위치, 규모, 출입구 위치 등을 상세히 관찰하고 돌아와 진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스파이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놀란 백씨는 망설였다.

이어서 이 소령은 “만약 북파되었다가 돌아오면 금전적 보상은 물론 자녀복지혜택까지 보장해 주겠다. 또 일이 잘못될 경우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하겠다”고 백씨를 설득했다. 백씨는 그만 이 소령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후 백씨와 이 소령의 친척인 박경열(77)씨 2명만이 미군부에서 훈련을 받았고 나머지 6명은 훈련을 받지 않았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당시 이들은 누가 어떤 훈련을 어떻게 받았는지 서로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북파 어선의 선장 역할을 맡은 백씨는 비정기적으로 부산진구 부전동에 위치한 캠프 하야리아 미군부대에서 3개월간 첩보활동을 위한 관찰법과 기억법 등 특수 훈련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어선위장 납북 계획의 주도면밀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은 또 있다. 이 소령의 친척인 박경열씨는 선장 백씨를 감시하는 내부감시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박씨는 이 소령으로부터 백씨를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박씨는 하야리아에서 1주일간 감시법을 비롯한 특수 교육을 받았다고 밝혔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당시 훈련을 총괄 담당했던 사람은 UDU 첩보대 팀장인 박모(사망)씨로 알려졌다. 북파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자 1966년 3월 말 백씨 등 8명은 중앙정보부에서 마련해준 어선 순평호를 타고 조업을 위해 떠나는 일반 어선들에 섞여 연평도로 향했다. 당시 위장납북어선의 일행이었던 박장순(68)씨는 “서로 비밀유지를 위해 말을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계획을 알 수 없었다”며 “간첩 훈련을 받은 백씨 등 2명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순평호가 연평도에 도착해서야 ‘이 배가 위장납북어선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빠져나갈 수 없는 길을 왔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이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선장이 해군 함정선장실에 갔다 오는가 하면 해군이 순평호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 66년 5월 14일 오전 1시경 이 소령의 침투지시 대로 조업 중이던 위장어선은 조업 작업을 하는 척하면서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오전 4시쯤 계획대로 북한경비정에 나포되어 해주로 나포됐다. 해주에 도착하자 북한의 정보국직원이 나와 이들을 평양으로 이송시켜 조사했다. 당시 이들은 북한으로부터 특별한 가혹행위를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 정보국은 관용차량으로 이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북한의 이모저모를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모란봉의 레이더 기지와 제철소 등의 산업시설도 포함된다.갑판장 김수석(사망)씨의 아들 김용복(58)씨의 말에 따르면 병원을 시찰할 때는 김수석씨에게 의치까지 해 주었다고 전했다. 4개월 간의 체류 끝에 1966년 9월13일 이들은 남한으로 돌아오게 된다. 8명 모두 무사히 남한으로 귀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북한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났다. 바람과 파도가 거세지자 항해가 불가능하여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도에 임시 정박하였다.

선장 백씨는 나로도에서 이 소령에게 전보를 쳐 삼천포 앞까지 나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삼천포 앞에서 해군 함정과 순평호는 조우하게 된다. 순평호를 접수한 해군함정은 순평호를 방첩대 사무실이 있는 부산 2부두로 인솔했다. 부산 2부두에 도착하니 이 소령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방첩대는 이들 위장납북 어부 8명을 모두 해군 작업복으로 갈아 입힌 뒤 부산여관에 투숙시켰다. 당시 경상남도 경찰국 대공과(공안과)에서 투숙된 이들을 조사했다.충무로 옮겨진 이들은 또 충무경찰서로부터 조사를 받아야 했다. 경찰의 조사가 끝나자 이들은 귀가 조치됐다. 그러나 3개월 뒤 또 다시 통역인을 동반한 미국인 2명과 정보요원이 찾아와 음식점이나 여관 등지에서 이들을 재조사했다.

박찬준씨는 “이들 위장납북 어부 중 김상건(사망)씨와 당시 기관장이던 배학봉(사망)씨 등 2명은 안기부와 국군 정보사에까지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수석씨의 아들 김용복씨는 이에 대해 “당시 위장납북된 어부들이 가져오는 정보는 군사적으로 볼 때 북파 공작원들에 의해 이미 접수된 것들이 대부분이라 큰 가치는 없었을 것”이라며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북파한 이유는 남한 내 고정간첩들을 색출하기 위한 일종의 작전이었다는 소릴 들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당시 한국 정보부는 어부들이 북한에 다녀올 경우 남한내 고정간첩들이 이들을 포섭키 위해 접선을 시도하거나 이들의 행동거지를 감시하기 위해 접근할 것이라 계산하고 덫을 친 것이라는 소리가 있다”며 “때문에 어부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단속하고 활동을 제한했으며 출국조차 막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의 말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정원의 주요간첩 수사결과에 따르면 북한은 과거 당장 이용하기 쉬운 평범한 기성세대를 포섭해 온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당시 남한보다 선진국이던 북한의 문물을 직접 체험했을 뿐 아니라 북한으로 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이들에게 남파간첩들이 접근할 가능성은 컸다. 때문에 위장북파어선이 남파간첩색출용일 것이라는 북파 어부들의 추측은 무게를 더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