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의 실체를 밝혀라’.수백억원대의 기업 비자금이 현금 뭉치로 정치권에 건네진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정·재계의‘검은 돈’의 실체에 대해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또 최근에는 17대 총선에 대비, 숨겨놓은 정치자금과 기업 비자금 규모가 수천억원대에 이른다는 소문이 사채시장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이에 따라‘엄청난 규모의 불법자금이 어떻게 조성·관리됐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통상 이런‘검은돈’은 돈세탁 과정을 밟게 마련이다. 날로 기발하고 대담해지고 있는‘돈 세탁’과정 및 유형 등에 대해 알아봤다.LG, 삼성, 현대자동차 등 기업들이 수백억원대의 정치자금을 정치권에 제공한 사실이 검찰조사결과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반인들은 ‘어떻게 이런 막대한 자금이 은닉돼, 정치권에 전달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이런 뭉칫돈이 유통되기 위해서는 ‘돈세탁’과정이 필수적이다. 일반적으로 ‘돈세탁’은 기업활동으로 부정하게 조성된 자금을 금융기관 등을 통해 합법적인 자금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말한다.즉 돈세탁은 불법행위로 취득한 현금, 유가증권 등을 은행 등 금융기관을 통해 환전, 송금, 예금, 보관, 위탁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금의 출처 및 형태를 바꾸거나, 깨끗한 돈으로 만드는 것.현재 검은 돈의 세탁을 막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으나, 그 효율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태. 2001년 9월 돈세탁방지 관련법이 통과되면서 금융기관은 ‘돈세탁’이 의심되는 거래내역을 재정경제부 산하‘금융정보분석원(이하 금정원)’에 보고하게 돼 있다. ‘원화 5,000만원 이상이거나 미화 1만달러 이상 금융거래 가운데 돈세탁 혐의’가 있는 경우에 신고토록 한 것이다. 금정원은 이렇게 신고된 거래내역을 분석해 그 결과를 검찰과 경찰, 국세청 등에 통보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이와 같은 ‘돈세탁’이 의심되는 거래가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정원에 따르면‘수상한 돈 거래’에 대한 금융기관의 신고가 지난 2002년에 비해 7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것. 지난 2002년의 경우 금융기관들이 돈 세탁 혐의가 있는 거래로 보고 신고한 건수는 262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의 경우 신고 건수가 1744건으로 7배 가량 늘어났다.이처럼 신고가 급증한 것은 지난해 대북 송금과 굿모닝시티 비자금, 대선자금 등의 자금 세탁 관련 사건이 잇따르면서 수상한 자금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금정원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지하시장에 묻혀 있던 ‘괴자금’이 17대 총선과 맞물리면서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즉 총선 정치자금 등에 이용될 검은 돈이 ‘돈세탁’과정을 거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실제로 최근 사채시장 등을 중심으로 ‘검은 뭉칫돈’에 관한 각종 풍문이 떠돌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이 17대 총선에 대비해 숨겨놓은 정치자금을 ‘돈세탁’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부 재계인사들이 마련해 놓은 비자금도 시중에 떠돌고 있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다. 이와 같이 돈세탁이 돼 이미 유통되거나 돈세탁을 기다리는 자금 규모만 4,000억∼5,000억원이 넘을 것이란 얘기도 돈다.서울 강남의 한 사채업자 C씨는 “대선·총선 등 선거철만 되면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금이 유통된다는 소문이 돈다. 실제로 뭉칫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들도 심심치않게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이어 “최근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등의 여파로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본격적인 선거철이 다가오면 또다시 뭉칫돈들이 돈세탁을 위해 사채시장으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그렇다면, ‘돈세탁’은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 것일까. 우선 가장 쉬운 방법은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방법. 비자금을 조성한 일부 정치인과 기업들은 통상 임직원이나 가족, 친척 등의 명의를 빌려 은행마다 수십개씩 계좌를 개설, 분산예치하는 방식을 쓴다.또 ‘대포통장’을 사용하기도 한다.

노숙자 등의 명의로 돼 있는‘대포 통장’을 수십개씩 사들인 뒤, 이를 통해 비자금을 돈세탁하는 것이다.실제로 최근 사채시장이나 인터넷 등에는 ‘대포통장’거래가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기도 하다. 보통 대포통장 1계좌당 10만∼30만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서울 신림동의 사채업자 L씨는 “대포통장을 팔겠다는 사람들과 사려는 사람들의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며 “보통 대포통장들은 노숙자나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의 명의를 빌려 개설하게 된다. 이렇게 개설된 통장들은 대개 돈세탁 등의 용도로 사용된다”고 말했다.돈세탁의 또 다른 방법은 ‘수표 교환’하는 방식. 거액의 수표를 은행이나 제2금융권, 백화점, 건설회사 등에서 다른 수표로 교환하는 것이다. 즉 1,000만원짜리 수표 1장을 백화점 직원에게 건네고 10만원짜리 수표 100장을 받는다면 쉽게 돈세탁을 할 수 있다.이와 관련, 최근 검찰은 불법대선자금 수사과정에서 A기업이 종로 등의 금은방에서 돈세탁을 한 뒤 이를 정치권에 건넸다는 혐의를 일부 포착, 조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도 당시 대기업으로부터 받은 뭉칫돈을 백화점 직원에게 건네는 방식으로 돈세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부동산 등을 이용하는 것도 ‘돈세탁’의 방법이다. 건설업체에 저리(低利)의 자금을 빌려주고 돈세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심각한 불황을 맞고 있는 부동산시장에 수억원에서 수백억원대의 뭉칫돈이 유입되고 있거나 유입이 시도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외에 기업과 정치인들이 ‘돈세탁’ 및 비자금 조성에 주로 애용하는 것이 양도성 예금증서(CD), 전환사채, 무기명 채권 등이다.이중 최근 가장 각광(?)받고 있는 CD는 무기명 고액권이라는 차원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다. 현대가 정치권에 건넨 비자금을 비롯해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이 SK로부터 받은 비자금도 역시 CD였다. 또 ‘무기명 채권’도 무기명 고액권으로 추적하기 힘들기 때문에 돈세탁 창구로 이용되고 있다.

삼성이 한나라당에 대선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이용한 것도 ‘무기명 채권’이었다.이처럼 돈세탁 기법이 날로 대담해지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돈세탁방지법을 개정, 금정원이 계좌추적권을 도입하고 처벌 규정도 강화하는 등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 ”고 말했다.노무현 대통령도 돈세탁 방지법과 관련, “금융거래를 할 때 은행이 지금까지는 의심되는 자금에 대해서만 신고하게 돼 있는데 의심이 있고 없음을 떠나서 뭉칫돈의 현금거래는 다 신고하고, 특별하게 소명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특별히 조사를 하게 하는 이런 제도개혁을 포함해서 여러가지 개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한편, 이달 중순께 ‘특정 금융거래 보고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면 금융기관의 돈세탁 혐의 거래 신고기준이 원화 2,000만원 이상으로 강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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