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상처들은 서서히 아물어가고 있다. 지울 수 없는 기억 속 상처들이…. ” 청소년 보호위원회(위원장 이승희)는 지난 4일 오후 광화문 프레스센터 18층에서 지난 10월 한달 간 공모한 성매매 피해 극복 수기 공모 당선작 12편을 선정해 시상하고 「희망까지 버릴 순 없어요!」라는 성매매 피해 극복 수기집을 내놓았다. 수기집에는 성매매 피해 청소년들이 가출한 뒤 겪은 성매매업소와 유흥업소 등에서의 탈출과 극복 과정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이승희 위원장은 “처음 공모를 계획했을 때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며 “이 수기집에 담긴 청소년들의 목소리는 어른들과 정부에 소중한 교훈이 될 것이고 또래의 청소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청소년들이 어른들과 바깥세상을 향해 던진 수기집 중 4편을 발췌했다.

수기1-티켓다방의 비참한 현실

‘오랜 방황 끝에 찾아온 비상’이라는 수기로 우수상을 받은 이정은(가명)양. 이 양은 6살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보육원에서 지내다 14살에 가출한 뒤 겪었던 티켓다방의 실태를 수기를 통해 낱낱이 고발했다. 이 양은 수기에서 “보육원은 나에겐 꼭 감옥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 긍정보다는 부정으로 비판적인 나. 사랑이 필요했기에 나의 사춘기는 시든 나뭇잎처럼 메말랐다. 순간의 갈등으로 인해 나는 가출을 시작했다”고 가출 동기를 말했다. 이 양은 흑심을 품고 접근한 한 성인 남성에 의해 티켓다방에 몸담게 됐다고 적었다. “(가출한 뒤)무작정 떠나 도착한 곳은 ○○ ○○. 친구와 난 떠돌이처럼 계속 걸었다. 느닷없이 우리에게 다가온 한 아저씨. 이유없이 친절하게 대했다. 숙식제공에 용돈까지 모든 것이 선행이 아니라 흑심이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그땐 흑심의 대가도 좋았다. 그 대가의 흑심은 우릴 다방이란 곳에 팔아 넘겼다. 집에 가겠다 말했지만 장부 속에 그 동안 우리가 받은 친절은 빚으로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무서웠다.”이 양은 그곳의 끔찍했던 폭력에 대해서도 수기에 담았다.

“12살의 어린아이가 우리 아가씨들 중 막내였다. 아주 충격적인 사실이면서도 그건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었다. -중략- 사장과 모두들 날 부를 때 새끼마담이라 불렀고 내가 마담으로서 아가씨 관리를 못해 문제가 생겼을 시엔 무서운 일들이 벌어졌다. 가게 삼촌들이 막내를 가두고 옷을 벗기고 노리개처럼 음부의 음모를 밀고, 심한 욕설에 찢어져 피가 나도록 막대로 쑤셔 넣었다. 야구방망이로 매를 맞고 저수지에 끌려가 포크레인에 거꾸로 매달려 물 속에 담그자 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경찰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 서울의 한 시설에서 생활했지만 적응을 못했던 이 양은 “다시 가출해 여러 남자를 만났고 무질서한 생활로 심한 병에 걸렸다”며 “어린 나이에 임신까지 해 막막했는데 독한 약물치료로 아이는 사산됐다”고 썼다.

이양은 수기에 못다한 학업과 보육사가 되겠다는 꿈도 함께 적었다. “내년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닐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보육사가 되고 싶다. 나와 같은 상처에 가슴 아파하며 울고 있을 아이들에게 내 사랑의 전부를 주고 싶다. 나는 오늘도 내일의 희망을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내일의 시계추가 울리도록…….”

수기2-동생과 함께 원조교제

‘오랜 방황의 끝’이라는 수기로 당선된 김하나(가명)양은 16살에 가출, 원조교제에 빠졌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김 양은 수기에서 “어렸을 땐 그래도 평범하게 살았지만 IMF 이후부터 집도 없어지게 되고, 남의 집에 얹혀살고, 빚만 쌓이고…. 집에 있는 하루 하루가 너무 싫고 짜증나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가출동기를 적었다. 김 양은 강간, 동거 등 숱한 일들을 겪었고, 나중엔 동생까지 집에서 나와 함께 지내며 갈 곳도 생활비도 없어 결국 원조교제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됐다고 고백했다. “방 빼고 나서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겨울 다 될 때라 춥고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바로 그 때 ‘080’이라는 번호가 생각이 났었다. 할까 말까 정말 많이 망설이다가 돈이 없고 동생도 같이 있는데 잘 곳도 없고 … 그래서 처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아저씨랑 하려니까 무섭고… 그랬다 …. 근데 그 아저씨는 내가 미성년자인 걸 알면서도 만났다.”김 양은 나중엔 자신의 동생까지 원조교제에 빠져들게 하고 말았다.

“돈이 없을 때 한두 번 하다 보니 점점 그게 내 생활이 되었다. 나중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하게 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은 어떤 아저씨가 동생이 마음에 든다고 꼭 동생이랑 해야겠다고 그래서 동생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그렇게 돈 받아서 옷 사고, 필요한 것 사고, 원조를 안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몇 번 하니까 자꾸자꾸 하게 되었다.”김 양은 원조교제를 중독성이 강한 마약처럼 표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중독인 것 같다. 안 하려고 해도 하게 되고, 돈 없으면 하게 되고 처음엔 싫고 무섭고 그랬지만 몇 번 하다보니 ‘돈이 없으면 힘드니까…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이미 버린 몸’이라는 생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 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너무 속상하고 내가 왜 그랬는지 너무 후회스럽다.”특히 김 양은 동생도 원조교제에 빠져들게 된 것을 가슴아파했다.

“근데 내가 제일 속상한 건 ‘나는 하더라도 동생은 하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건데…’끝까지 말리지 못한 게 너무 가슴 찢어지고…속상해서 영원히 죄책감으로 가슴속에 남을 것 같다.”김 양은 수기의 마지막에 “이젠 옛날의 내가 아닌 다시 태어난 것처럼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지내서 너무 좋고 그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되어서 정말로 좋다”며 “열심히 배우고 꼭 자격증 따서 취업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수기3-저주했던 엄마처럼의 삶

조진영(가명)양은 ‘나의 이야기’란 수기에 “우리나라 청소년 성매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확실히 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고 적었다. 조 양은 수기에 “어려서부터 ‘니 그 어미처럼 창녀 될 년’, ‘지 어미랑 똑같네’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제 친엄마는 미아리 여성입니다. 아빠가 빚을 갚아주고 데리고 와 결혼을 하였고, 저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끝내 저를 버리고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갔습니다”고 아픈 과거사를 고백했다. 그러나 조 양은 17살 때 겨울, 엄마와 똑같은 일은 아니지만 비슷한 일을 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친구가 일(티켓다방)을 시작하면서 방세, 생활품을 저도 모르게 제 이름으로 맞보증을 섰던 것입니다. 친구는 업주에게 제가 일을 할거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친구가 저를 데리러 와서 놀러가 보니, 업주는 제가 일하기로 한 걸로 알고 있었고 친구는 그제서야 사정을 말하며 ‘조금만 하고 나가자’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잘 모르고, 그때는 맞보증 섰다는 이유로 꼭 일을 해 주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조 양은 이 때부터 티켓다방 일을 시작했고, 3개월 뒤 탈출에 성공했지만 갈곳이 없어 다시 친구가 있던 다방을 찾고 말았다고 썼다.

“이번 다방에서 저는 1년을 일했습니다. 일을 하면서 정말이지 안 겪어본 일이 없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술병이 나 병원신세를 져야 했고 테이블 위에서 옷을 벗고 놀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발로 멍이 들 때까지 맞았으며, 가슴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고 칼로 찔릴 뻔한 적도 많았습니다.”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나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는 조 양은 배움을 통해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수기에 피력했다. 그리고 사회에 충고했다. “지금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성매매 피해여성을 비판하시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겪어보지 않는 이상 모른다고, 그 누구도 자신이 정말 좋아서 몸을 파는 여성은 없다고, 유혹과 자신만의 사정으로 들어가 협박과 빚, 상처들로 인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그들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수기4-‘악마와의 계약’

가작 수상자인 김정희(가명)양은 ‘희망을 가득 실은 내 삶 속에 새 생명이’라는 수기에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항상 돈 때문에 엄마와 아빠의 잦은 싸움이 일었고, 폭력도 난무했다”며 “난 커서 꼭 많은 돈을 벌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는데 22살 무렵 중학교선배를 만나면서 성매매의 굴레에 빠져들게 됐다”고 적었다. 김 양은 “명품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치장했던 그 선배가 ‘술은 꼭 마실 필요는 없고, 버리면 된다. 눈 딱 감고 마음만 먹으면 23만원이 네 손에 들어오고 한 달이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손을 대었다”고 털어놨다. 김 양의 선배는 윤락업소, 성매매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이었던 것.

“굉장한 권력가의 보스처럼 보이는 이와 TV에서 나오는 돈 많은 부유층 사모님처럼 보이는 마담이 있는 그 자리에서 200만원이란 돈을 받으면서 난 악마와 계약을 맺고 말았다. 결코 윤락업소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략-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사장의 태도와 마담의 횡포에 그 후 2곳을 전전했고, 첫 계약에서 인정할 수 없었던 영업비, 결근비, 지각비, 엠티비, 숙소제공비까지 600여 만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빚은 점점 불어났고 업주의 횡포는 심해졌다. “2차를 거부하다가 마담의 폭언에 못 이겨 나갔다가 손님과 갇혀진 모텔 안에서 2시간동안 무자비하게 도움도 요청하지 못하고 폭력을 당한 적도 있었다. -중략- 치마의 길이도 제한 당하고, 성형수술도 강요당하고, 도박도 배워야 했으 며, 길거리에서 수치심도 무릅쓰고 P.R도 했었고, 골프도 배워야 했다.

심지어는 아무리 힘든 손님도 마담이나 손님의 요구에 맞춰져 밤새도록 시달렸고 혹여 포기하는 마음으로, 위협을 느껴 그 공간을 나올 경우 어김없이 그 손님이 먹은 술값, 2차비까지 몽땅 아가씨의 빚으로 올려졌다.”빚더미에 몰린 김 양은 자살시도를 몇 차례 했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다 ‘여성의 전화’의 도움으로 길었던 화류계 생활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은 간호사로 새 삶을 살고 있는 김 양은 “아무 힘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짓밟히는 여성들을 위해 소리칠 것이며 계속 세상에 알릴 것이다”며 “그 길만이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사랑이란 단어를 알려준 이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한다”고 수기의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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