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역 ‘개성공단’에서 처음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9년 반 전인 2004년 12월 15일이었다.
(주)리빙아트 공장에서 첫 생산된 1000세트 냄비는 곧 바로 서울로 운송돼 소공동 롯데백화점 특설매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첫 제품생산 기념식장에 참석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장밋빛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다.
그는 기념사를 통해 “개성의 생산기능, 인천의 물류기능, 서울의 금융기능이 결합되면 경쟁력 있는 복합 경제특구가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개성공단은 “경쟁력있는 경제특구”가 아니라 “망하는 특구”로 전락되고 말았다.

개성공단에 대한 북한의 의도는 음흉하기 짝이 없다. 북의 붉은 계략은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남 공작기구인 통일전선부에 내린 지시에서 드러났다. 그는 개성공단에 많은 남한 기업들을 끌어들여 전략적으로 필요한 때 남한을 정치·경제적으로 위협하는데 도구로 활용하라고 지시했다. 돈은 챙기면서도 남한정부 협박의 도구로 이용키로 한 것이었다.

김정일의 개성공단 위협 도구화 지시는 북한의 남북관계 목표가 평화·협력에 있지 않고 오직 남한 적화에 있음을 반영한다. 김일성 주석은 1972년 남한과 7·4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성명의 ‘자주·평화·민족’ 3대 원칙을 주한미군 철수와 남한 적화를 위한 평화공세로 이용하였다. 부전자전격으로 그의 아들 김정일도 김대중 대통령과 발표한 6·15 공동선언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문구를 연방제 적화통일의 선동 기반으로 삼았다.

북한의 1차 개성공단 도구화 책동은 2009년 3월 김정일에 의해 키리졸브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 요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키리졸브 훈련을 중지하라며 세 차례에 걸쳐 남한측의 개성공단 육로 진입을 차단, 위협하였다. 이어 북한의 2차 개성공단 도구화는 그의 아들 김정은에 의해 획책되었다. 김정은은 4월 8일 개성공단 사업을 잠정 중단한다며 북한측 5만4000여 명의 근로자들을 전원 철수시켰다. 여기에 4월 26일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대화 요구에 응하지 않자 개성공단 한국측 123개 업체 700~800명의 근로자 귀환 조치를 취하였다.

개성공단 파국으로 북한은 연간 8600만달러에 이르는 근로자 임금 수입을 잃게 되었고 남한의 진출기업들은 도산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남한의 공단 인원 7명은 볼모로 잡혔고 기업들의 투자와 손실금액은 1조 내지 4조 원에 이를 것이란 계산이 있다.

개성공단의 파국은 북의 위협 도구화 책략으로 피할 수 없는 예정된 코스였다. 다만 시간 문제였을 따름이다. 처음부터 우리 국민들은 남한 기업과 근로자들이 볼모로 잡힐 수 있으며 북에 지급한 임금은 포탄되어 되돌아 온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개성공단 확장에만 몰두 하였다. 심지어 노 정권은 대기업들에게 개성공단 입주를 종용하였다. 개성공단 파국을 이미 예견했던 대기업들은 정부 종용에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김·노 두 정권은 개성공단을 남한 기업의 장래 보다는 햇볕정책 전시장으로 삼았다. 대기업 처럼 파국을 예상치 못했던 개성공단 진출 기업들은 햇볕정책의 제물로 바쳐진 셈이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2차 개성공탄 도구화 책동이 중단된다 해도 앞으로도 개성공단 도구화에는 변화가 없을 것임을 직시해야한다. 정부는 그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개성공단 재가동에 앞서 북한이 다시는 북한 근로자들을 철수시키고 남한측의 공단 출입을 막는 등의 작태를 되풀이 할 수 없도록 묶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공단 재개에 급급한 나머지 북한에 끌려간다면 제3, 제4의 개성공단 파국은 반복될 수 밖에 없다. 정부는 기왕 개성공단에서 철수한 이상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바로잡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북한을 길들이기 위해선 북과의 대치국면을 각오하고 독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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