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7일 가졌다. 두 정상은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한미동맹 60주년은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 된 날을 기점으로 본 숫자다. 그러나 두 나라 관계는 그 보다 두 배 더 긴 131년의 역사를 지닌다. 1882년 5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날 두 나라 사이에는 한미수호조약이 조인되었다. 당시 미국은 서양 국가들로서는 최초로 조선조와 수교를 맺은 나라가 되었다.
조선조가 미국과 수교하게 된 까닭은 한반도 지배를 둘러싼 19세기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에서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조선조는 일본, 중국, 러시아, 3국들이 한반도 지배를 놓고 혈전을 벌이자, 영토 팽창 야욕이 없는 미국을 끌어들여 3국들에 의한 주권침탈을 막아보려 했다. “독(毒)을 독으로 중화”시키기 위한 외교적 포석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조의 기대처럼 일본의 조선 찬탈을 막아주지 못했다. ‘타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해 주고 1905년 한양을 떠났다. 테오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조선을 포기해야 했던 이유로 구제불능의 무능을 꼽았다. 그는 1905년 1월 조선이 “자신의 방어를 위해 한 펀치도 날릴 수 없다”며 자위력이 전혀 없음을 개탄하였다.
그로부터 40년 만에 미국은 일본을 패망시키고 한반도에 상륙,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1949년 6월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주한미군의 철수를 기다렸던 북한은 꼭 1년 뒤 6·25 기습남침을 감행하였다. 미국은 다시 군대를 파견, 대한민국을 되살려 냈다. 한미방위조약은 휴전 후 북한의 또 다른 적화책동을 저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방미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양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화와 안정의 핵심축(Lynchpin)으로 기능’할 것을 재확인했다. 미국의 확고한 대한방위공약 강화,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의 충실한 이행, 북핵에 대한 한미공동 대처등도 강조하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미관계가 군사동맹에서 출발해 경제동맹으로 발전했으며 이제는 사회·문화·인적 교류 등 ‘사회동맹’으로 진화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6~7년 전만 해도 한미 두 나라는 깨진 동맹으로 이탈해 가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미주의면 어떻습니까” “미국과 가치관 다른 프랑스에 더 매력 느낀다”며 공공연히 반미를 토해냈다. 데니스 헬핀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전문위원은 한미관계를 “관(棺)속의 시신,” 커트 캠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국장은 “한미는 이혼한 파경 부부”라고 했다. 서울 영등포 경찰서 소속의 이 모 경사가 울분을 참다못해 2004년 9월 열린우리당 홈페이지에 노 정권은 ”김정일의 2중대“라고 썼을 정도로 반미종북으로 막갔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 김정일을 섬겼던 정권이 빚어낸 국가적 위기였다.
저와 같이 한미관계 131년 역사는 평탄치 못했고 굴절도 심했다. 한때는 “관속의 시신”으로 변질되었었지만, 다행히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르러 다시 혈맹으로 복원되었으며 60주년 공동선언에서 명시한 대로 ‘글로벌(국제적) 파트너(협력)’로 일어서기에 이르렀다.
두 나라는 ‘글로벌 파트너’로’ 통일 후에도 끈끈한 유대를 유지해 가야 한다. 역사적으로 조선조를 탐했던 중국·일본·러시아 틈에 낀 작은 나라로서 3국의 압력을 견뎌내기 위해선 미국 같은 묵직한 맹방의 버팀목이 요구된다.
19세기 말 조선조가 미국을 끌어들여 “독을 독으로 중화”시키려 했던 외교적 포석은 지금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절대 요구된다. 다만 한미 혈맹관계가 다시는 “관속의 시신”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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