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와는 달라야 한다고 지난 16일 주문했다. 그는 “박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전혀 다르다는 걸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며 “소통”을 강조했다. 22일 박원순 서울시장도 국무회의가 “너무 엄숙해서 토론하는 분위기가 아니다”라며 “나도 말 한 마디 못 하겠더라”고 토로했다. 박 대통령이 아버지 시대의 권위주의적 “엄숙”에 묶여 있다면서 시대적 상황 변화에 부응해야 한다는 지적들이다. 정치 지도자의 시대적 상황 변화 부응 논리는 19세기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과 독일의 칼 마르크스 두 사람의 상반된 입론을 떠올리게 한다. 칼라일은 영웅이 역사를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영웅적인 리더십이 혁명의 방향을 바꿨다고 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웅이 시대를 주조(鑄造)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반대편에 섰다. 그는 “개인(영웅) 생각대로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란 이미 존재하는 환경과 시대적 상황의 부산물로 전개될 따름이다”라고 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 영웅을 빚어낸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에 의한 공산주의 폭력 혁명을 주창해 20세기 인류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겼지만, 역사가 “시대적 상황의 부산물”이란 주장만은 옳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공해를 마시고 싶다”고 토로했을 정도로 산업화에 모든 걸 바쳤다. 그의 1960~70년대 산업화 정책은 국민의 기본권을 유보하고 권위주의 철권(鐵權)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의 철권정치는 당시 아프리카 빈국 보다 더 가난했던 대한민국의 “시대적 환경”이 빈곤탈출을 위해 요구했던 “시대적 상황의 부산물”이었다.

영웅은 “시대적 상황의 부산물”이란 사실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과 그에 따른 “뉴 딜(New Deal)” 정책의 출현에서도 입증되었다. 1933년 1월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자유방임을 포기하고 영국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정부 개입정책을 과감히 차입했다. ‘유효수요 창출’ 이론이었다. 당시 일부 미국인들은 루스벨트가 “뉴딜”로 미국을 공산화한다며 크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그 때 미국이 처한 대공황은 정부 개입에 의한 ‘유효수요 창출’을 통해 탈출구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루스벨트를 “뉴딜“ 영웅으로 밀어올린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작금의 “시대적 상황”이 60~70년대의 아버지 시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나 국무회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 고개를 숙인 채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기에만 급급한다. 정책입안과 결정을 위한 토론장이 아니라 훈시를 받는 훈육장 같은 느낌을 준다. 30~40년 전 그의 아버지가 주재하던 회의를 연상케 한다. 박 대통령은 어렸을 때 익숙해졌던 아버지의 정치문화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때 처럼 우리 국민은 가난하지도 않고 교육수준도과 정치문화의식도 낮지 않다. 정치 지도자는 그 “시대적 상황“에 맞는 지도력을 발휘해야 성공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은 고도로 전문화, 분화, 자유화, 개인화된 사회다. 지도자 한 사람에 의한 불통의 판단력으로는 대처하기 어렵도록 복잡하게 얽혀있다. 불통의 판단은 이미 윤창중 스캔들을 비롯 적지 않은 부작용을 빚어냈다. 그래서 일방적 훈시 보다는 전문 의견을 거두어 모을 수 있는 수렴(收斂)이 요구된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원칙과 소신”은 지켜가되 활발한 토론을 끌어내 불통(不通) 아닌 수렴과 소통의 도량을 발휘해야 한다. 수렴과 소통의 리더십은 2010년대 대한민국의 “시대적 상황”이 요구하는 명제임을 되새겨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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