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선선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제법 쌀쌀한 찬바람이 불고 있는 요즘이다. 올해를 불과 한달여밖에 남겨놓지 않은 지금, 세상은 이제 완전한 겨울 분위기에 접어들었다.겨울은 연인들의 계절이다. 이성간의 사랑으로 매서운 추위도 이겨낸다는 의미에서 나온 ‘늑대 목도리’, ‘여우 허리띠’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겨울을 나겠다는 연인들의 야무진 바람은 대한민국에 새로운 성풍속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19일 금요일 밤. ‘뚝섬 한강둔치에 가면 묘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말에 기자는 그곳을 찾았다.밤이 깊어갈수록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다. 게다가 강바람까지 곁들여져 실제 체감온도는 훨씬 낮게 느껴졌다.

밤바람을 쐬러 늦은 시각 이곳을 찾기에는 무척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주말을 앞둔 탓인지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주차된 차량들을 바라보던 기자는 어느 순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주차되어 있는 차들은 제각기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차안에 사람이 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차안에서 간간이 새어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웃음소리, 난방 때문인지 시동이 켜진 모습, 얼핏 얼핏 비취는 그림자들로 미루어 볼 때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몇몇 커플은 차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강바람을 쐬는 듯하더니 이내 차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개중에는 매점에서 음료수와 군것질 거리를 사서 차안으로 들어가는 커플들도 눈에 띄었다. 차안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실속파 커플인 것이다.어느 계절을 막론하고 한강 둔치에서라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들 연인들의 행동에서 특이한 점을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몰카도 피하고피하고 안전빵?

자정이 되어갈 무렵, 한강 둔치에는 헤드라이트를 밝힌 차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들은 밀려 들어왔다. 우물쭈물거리며 주차할 마땅한 공간을 찾는 듯 보였다. 다른 차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주차를 마친 차량에서는 짐작대로 젊은 연인들이 내렸다. 그리고 이들은 마치 계획이나 한 듯이 매점으로 향했다.‘뜨거운 커피나 군것질거리를 사겠거니’ 생각했던 기자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들 커플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아닌 컵라면. 이들은 제각기 뜨거운 물이 담긴 컵라면을 들고 다시 차로 향했다. 이상한 것은 늦은 시간에 이 곳을 찾는 커플 중 상당수가 컵라면을 들고 차로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매점에서 먹지 않고 차안에서 컵라면을 먹는 커플들의 행동도 신기했지만, 한두 커플도 아닌 다수의 커플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컵라면을 사들고 들어가는 모습은 더더욱 이상했다.

굳이 좁은 차안에서 냄새를 풍기며 라면을 먹는 커플들이 기자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그들에게 자동차는 사랑을 나누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즉 기자가 목격한 커플들 중 상당수는 카섹스족이었던 셈. 그렇다면 그들은 왜 굳이 컵라면을 사서 차안으로 들어가는 걸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이들의 목적은 라면을 먹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좁은 차안에서 뜨거운 라면을 먹다보면 차 유리가 수증기로 뒤덮이게 되는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실제로 라면을 들고 들어간 커플들의 차량은 순식간에 내부를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되었으며 선팅이 되지 않은 앞유리까지도 ‘완벽하게’ 가려졌다. 밖에서는 도무지 차 내부를 분간할 수 없는 완벽한 차단 시스템이 갖춰진 셈이었다.이들에게 추운 날씨 따위는 사랑을 나누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바깥 날씨가 추울수록 ‘사발면족’들에게 더없이 좋은 데이트 장소였다.

“촌스럽게 사발면족도 몰라요?”

기자는 사진을 찍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한 커플과 몇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늦은 시간에 여자친구와 한강둔치를 자주 찾는다는 대학생 K(26)씨.그는 “바람 쐬러 자주 와요. 둘 다 술은 잘 못해서 늦은 시간에 마땅히 할 게 없어서요”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많은 커플들이 컵라면을 사서 차안에서 먹는 장면이 신기하다”는 기자의 말에 K씨는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아~ 사발면족이요? 처음 보셨어요?” K씨에 따르면 추운 겨울이면 한강 둔치에는 사발면을 먹고나서 카섹스를 즐기는 속칭 ‘사발면족’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보통 11월 말부터가 이들의 ‘전성기’라는 것이다.사발면족들은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공간에 숨어 ‘밀애’를 즐기는 아베크족의 변형으로 보면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보통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 이곳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해요. 한창 출출한 시간이잖아요. 차안에서 커피만 마시란 법 있나요? 야식으로 사발면을 먹으면서 얘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TV도 보고…그렇게 데이트를 즐기는 거죠.”K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카섹스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아요. 밀폐된 공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보니 분위기상 그렇게 되는 거죠. 특히 사발면족들은 수증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차 내부가 안보인다는 점을 이용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거죠. 외부에서 즐긴다는 스릴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방해받을 염려가 없으니까 요즘 최고 인기예요.” 사발면족의 증가는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 K씨는 “사실 데이트하는데 돈이 한두푼 드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자친구랑 사랑을 나누려해도 장소도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매번 모텔에 가기도 그렇고…그 비용을 감당하기도 만만치 않죠. 또 솔직히 ‘몰카’ 때문에도 모텔은 좀 꺼림칙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보면 사발면 데이트는 아주 알뜰하고 실속있는 셈이죠”라며 웃는다.‘사발면족’의 데이트에 대해 설명하던 K씨는 “‘사발면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사실 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그러나 여자친구가 워낙 유난스러워 꿈도 못꾼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겨울은 카섹스의 계절이죠”

“데이트요? 차안에서 다 해결해요.” 사발면족 김장수(25·가명)씨의 말이다. 그는 자타공인 자동차 마니아다. 차를 좋아하는만큼 그는 많은 시간을 차에서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역시 예외는 아니다.현재 김씨의 차량은 젊은층에서 유독 인기를 끌고 있는 외산 스포츠카. 여지껏 차에 들인 돈만해도 수천만원 가까이 된다는 그의 차는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사제 오디오와 스피커, TV를 포함, 내외부로 최고급 튜닝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가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다는 애마를 끌고 주로 이용하는 곳은 서울 뚝섬의 한강둔치. 그는 “차안에서 여자친구와 음악을 들으면서 스킨십을 나눌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는 실제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차안에서 여자친구와 은밀한 시간을 보내다간다고 털어놨다.처음에는 거부하던 여자친구도 이제는 독특한 사발면 데이트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모텔에서 관계를 가질 때는 느낄 수 없던 스릴이 느껴져서 두 사람 모두 무척 만족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김씨는 커플들끼리 단체로 만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주말같은 경우 한번 화끈하게 ‘배틀(레이싱)’을 하고 난 뒤 이곳에 모이기도 해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어울려서 노는 것은 아니고…애인이랑 ‘개인 시간’을 갖고 나서 술자리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죠.”옆에 있던 김군의 친구 이모(25)씨는 “솔직히 부모님 계신데 여친(여자친구)을 집에 데려갈 수도 없고 매번 모텔에 가자니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고 겨울 데이트에는 자동차가 최고죠”라고 맞장구를 쳤다.

경범죄 VS 사생활침해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경찰의 단속. 이씨는 “제가 한번 걸려 봤거든요. 짭새(경찰)들이 경범죄로 즉심에 넘기더라고요”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창피한 것은 둘째치고 정말 난감했죠. 저는 남자니까 그렇다쳐도 여친은 얼마나 창피했겠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서 땀이 나요.”이씨의 여자 친구는 “정말 죽고 싶을 정도였어요. 차안에서 연인끼리 사랑을 나누는 것이 뭐가 잘못이죠? 일부러 남의 차안을 들여다보면서 경범죄니 뭐니 해서 단속하는 것이 더 웃기는 거 아닌가요?”라며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카섹스를 하다가 걸리면 경범죄로 과태료를 물거나 즉심에 회부된다고 한다.

죄명은 ‘공연음란죄’. 이씨는 “‘공연음란죄’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공공연하게’하는 행위에 해당될텐데 카섹스를 ‘공연음란죄’라고 얘기하는 것은 이해가 안돼요”라고 말했다. 또 카섹스족에 대한 단속을 두고 일부에서는 ‘사생활 침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결혼 3년차인 이규진(33·가명)씨는 “솔직히 남편과 가끔 자동차에서 즐길 때가 있는데, 무료한 일상의 탈출구라고 해야 되나…스릴 있고 너무 좋았어요. 일부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카섹스를 무조건 불륜행각이나 변태로 몰아붙이는 시각이 안타까워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카섹스를 권태 극복 차원에서 즐기는 사람들마저 법적 테두리에 가둬두고 처벌하는 것은 가혹해요. 오히려 사생활 침해아닐까요?”라고 되물었다.


# 종합청사 주차장, 낮에는 정부기관 밤에는 아베크족 집결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카섹스 아베크족. 최근 이들 사이에 떠오르는 장소는 과천 종합청사 주차장이다. 카섹스 예찬론자인 회사원 공석중(31·가명)씨는 “정부기관이다보니 주차장도 넓고 무엇보다 안전해요. 주로 애인이 준비해 온 커피를 마시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죠. 그러다 서로 필(feel)이 통하면 찐하게 놀죠. 아…근데 너무 많이 알려지면 곤란한데…”라며 웃는다. 야심한 밤 정부기관 주차장에서의 정사는 아베크족들에게 비밀아닌 비밀로 통하는 ‘이벤트’라는 것. “오래된 연인이라 권태기라 느낄 땐 이곳을 찾아요. 방음 시설도 잘 돼있고 둘 만의 공간에서 분위기까지 잡을 수 있으니 기쁨 두배죠. 처음에는 어두워서 무섭다며 애인이 안절부절못하더라고요. 하지만 요즘엔 애인이 먼저 오자고 해요. 보온병에 커피도 알아서 챙기고요.” 그는 이곳말고도 몇몇 비밀스러운 장소를 더 알고 있다고 했지만, 소문나면 단속이 들어오기 때문에 곤란하다며 끝내 입을 닫았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