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최은서 기자] 북한을 탈출한 탈북 고아를 북한에선 ‘꽃제비’라고 부른다.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꽃제비 9명이 라오스에서 강제 추방돼 다시 북송된 것을 놓고 국내외에서 파장이 크다. 이에 [일요서울]은 탈북자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도 적극적 대응에 나섰던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을 만나봤다. 김 회장 역시 탈북자다. 굴곡진 그의 탈북 과정은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었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된 한국 땅에서 자신의 성공을 꿈꾸기 보다는 다른 탈북자들을 돕는 데 온 몸을 던지고 있다.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은 함경남도 단천에서 중국으로 탈출한지 14년, 한국에 온 지 7년 만에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 한국 땅에서 주민등록증을 받은 지도 올해로 11년째다. 자유를 찾아 국경을 넘었던 그의 존재가 처음부터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한국에서 ‘불법 입국자’로 몰려 타국으로 나가라는 요구를 받는 등 ‘분단의 비극’을 온 몸으로 느끼기도 했다.

영화같은 탈북과정

그의 탈북과정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이야기였다. 북한 함흥 철도국 지도원으로 일했던 김 회장은 한국에서 88올림픽이 치러지던 1988년 탈북했다. 당시 열차 7대가 전복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는 “만약 탈북하지 않았다면 철도노후의 책임을 지고 공개 총살 당했을 것이다. 자식들 앞에서 초라하게 총살당하기 싫어 떠난 걸음이 결국 탈북이 된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때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쫓기는 삶이 시작됐다. 그는 권총 한 자루와 당증만 몸에 지닌 채 이틀 동안 쉬지않고 걸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북했다. 그 당시는 중국이 개방을 하지 않은 상태라 한국에 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산동성, 지린, 랴오닝 등 중국 각지를 떠돌다 베트남으로까지 건너가게 됐다. 그는 “배를 곯고 거리를 떠돌아다니니 정신이 나가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의 위협을 늘 느꼈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베트남에 도착한 그는 한국정보에 망명신청을 했지만 한국정부는 ‘외교마찰’을 이유로 등을 돌렸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에만 가면 될 것’이란 생각에 몸에 튜브를 끼고 헤엄쳐 한국 무역선을 올라 타 밀항을 시도했지만 베트남 공안에 체포 돼 북송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는 북송돼 죽임을 당하느니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그런데 쌓인 감정이 폭발해 유치장 간부를 폭행한 것이 전화위복이 돼 2년 형이 선고, 북송이 연기됐다. 다시 출소시기가 다가오자 그는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탈옥, 라오스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다시 탈옥해 무작정 중국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한국인 신혼부부의 도움으로 쪽배를 마련해 팔뚝 크기의 빵 6조각과 나침판, 방수비닐만 들고 무작정 18일간 노를 저어 한국 안면도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내 심정은 모든 운명은 하늘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절박하게 노를 젓고 또 저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간첩’ ‘불법입국자’라는 의심을 샀다. 김 회장은 “한국 정부는 날 좋은 곳에 데려가 주겠다고 하더니 외국인수용소, 구치소, 교도소에 차례로 보냈다. 기가 막혔다. 나를 따라온 것은 그림자 밖에 없었는데 색안경을 끼고 바라봐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라고 토로했다. 그의 수감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간첩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서 결국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자신을 끝없이 의심하는 한국에 실망한 김 회장은 98년 태풍이 몰아치던 4월 중순께 전라도 진도에서 쪽배를 구입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심정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도 악명 높은 오무라 수용소에 갇혔지만 일본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보석으로 가석방돼 한국으로 재입국하게 됐다.

사람 살리는 삶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당시 그에게 있어 남북한 모두 ‘철천지원수’와도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따뜻이 어루만져준 故 김수환 추기경으로 인해 ‘나누고 돕는’ 제2의 인생 서막을 올릴 수 있었다. 그는 “은사인 김수환 추기경께서 마음을 비우라고 하셨다. 분단의 비극 때문이니 분노를 버리라며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일깨워주셨다. 세계 각국에서 많은 고마움을 받은 만큼 베풀고 살아라고 이야기해주셨다”라며 “그 말씀을 듣고 사람 살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탈북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고 털어놨다.

현재 탈북난민인권연합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자 수만 6000여 명이다. 그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대부’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탈북루트로 자주 이용되는 중국에서 10년 넘게 탈북자 피난처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탈북자의 아픔은 탈북자들만이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남들은 나의 탈북과정을 한 편의 영화, 소설처럼 듣겠지만 탈북자들은 나와 같은 길을 걸은 사람들이어서 똑같이 아파하고 공감한다. 우리 단체를 통해 수천 명의 탈북자들을 구출한 것은 가족을 살린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자랑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무실 이외에도 창고를 하나 운영해 전국각지에서 기증받은 물건들을 보관, 탈북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대부분 중국 탈북자들에게 건네진다. 가장 많은 기증품이자 가장 중요한 것이 옷이다. 여러 물품들도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옷은 ‘신변보호’를 위한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는 “이번 꽃제비 9명은 남한으로 보내달라고 애걸복걸했던 아이들이기 때문에 북송된 이상 기본적으로 사형 또는 정치범 수용소 종신형이 선고될 것이다. 더구나 선교사를 통해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처벌은 더 가혹할 것이다. 북한은 신앙을 갖는 것이 엄격히 금지돼 있기 때문”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또 “내가 탈북 이후 긴 시간을 돌아오지 않았다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크다. 언젠가 남북한도 통일이 되지 않겠나. 그 때를 생각해서라도 현실적 대안을 제시해야할 때다. 지금 우리 사회는 통일과 관련해 현실과 대안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 공짜로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는 환상은 버리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부터 차근차근 이뤄나가야 한다”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끝으로 그는 “이 일은 마약과도 같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보람은 말로 설명 할 수가 없다. 나는 돈을 쫓는 인생보다는 사람 살리는 인생을 살고 싶다.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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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 기자  choie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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