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에로영화계는 한 남자배우의 등장으로 술렁거렸다. 신영웅(34)씨가 그 주인공이다. 수려한 외모와 탄탄한 몸매로 순식간에 에로업계의 황태자로 올라선 그는, 특이한 경력으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프로야구선수에서 강남최고 나이트클럽 부사장을 거친 그의 인생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오랜 방황을 접고 다시 야구공을 잡았다. 그를 만나 그 속사연을 들어봤다.16일 오후 6시. 평촌의 한 카페에서 신씨를 만났다.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카페에 들어선 그는 서른 중반의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만큼 동안이었다. 또 익히 들은 소문대로 그는 에로배우라 하기에는 너무 아까울 만큼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꽃미남 가수 K씨를 닮은 외모와 야구선수라는 전력 탓에 별명도 ‘안타’, ‘장타’라는 신씨. 평소 말이 별로 많지 않다는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신씨가 에로배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00년 초. 그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에로배우의 길을 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주연을 맡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신씨는 자신의 성격이 매우 급한 편이라고 전했다. “무명생활을 견딜 만큼의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는 그는 “조급한 마음에 공중파에서 주연의 자리를 꿰차는 날을 기다리기보다는 18mm 필름에서라도 최고로 군림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당시 에로업계에는 사실상 이렇다할 남자배우가 없었다. 에로라는 장르의 특성상 프로의식을 갖고 지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배우를 선발하는 과정에서도 엄격한 심사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 외모나 연기력이 허술한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그런 와중에 신씨의 등장은 그의 출중한 외모만으로도 당시 에로업계에 상당한 파란을 몰고 왔다.

더구나 피나는 자기관리와 노력 끝에 신씨는 외모뿐 아니라 연기로도 합격점을 받았다.그가 처음 찍은 영화는 ‘카사노바의 섹스파트너 217번째 여자.’ 이 영화는 그를 에로배우로 확실히 자리매김시켰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것과 기존의 에로배우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려한 외모의 꽃미남이 출연한다는 소문에 이 비디오는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행운은 행운을 몰고 왔다. 첫 작품의 성공으로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신씨를 업계에서 가만 놔둘리 없었다. 다른 기획사에서 출연제의가 물밀 듯 들어왔다. 그렇게 찍은 영화가 무려 50여편. 닥치는대로 일을 한 탓에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이후 신씨의 삶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선수생활 접고 밤의 황태자로
어릴적부터 그의 꿈은 야구선수였다. 또 실제로 그는 93~94시즌 해태에 몸담은 프로야구 선수 출신이기도 하다. 야구 명문 남정초교 시절부터 야구공을 잡은 신씨는 야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어린시절 부모님의 불화로 그는 중학교 때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야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아픈 사연을 털어놨다. 그렇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 결과 장충고 시절 고교선발군에 뽑힌 정통파 투수였을 뿐 아니라 고교 졸업 후에는 높은 계약금을 받고 해태타이거스에 입단하는 등 그의 인생은 활짝 피어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정작 프로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고1때 오른쪽 팔꿈치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탓이었다. “당시 의사가 정상인으로 살려면 야구를 포기해야 한다고 충고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야구를 포기한 것에 따른 충격은 엄청났다. 소줏잔을 기울이며 넋두리를 늘어놓는 시간이 늘어갔다.그러던 중 신씨는 그의 외모와 체격조건에 반한 에이전시 매니저에게 일명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모델일을 시작하게 된다.

특히 속옷모델은 그의 강점인 탄탄한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데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야구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그에게 돈의 유혹이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신씨는 모델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또다른 유혹에 흔들리게 된다. 모델일을 하는 동시에 선배들의 권유로 강남에서 가장 유명한 J나이트클럽의 영업이사로 뛰게 된 것이다.신씨의 외모는 밤세계에서 유독 잘 통했다. 수려한 외모는 남들보다 월등한 영업실적으로 이어졌고 그는 엄청난 소득이 보장된 부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신씨는 젊은 나이에 강남 밤세계의 황태자로 군림한 것이다. “매일 밤 돈쓰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는 그의 말처럼 외제차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하는 것은 기본, 실로 화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돈쓰는 재미도 딱 석달 뿐이었다”며 밤생활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나타냈다.나이트클럽 일을 하는 와중에도 종종 공중파로의 진출을 시도했으나 생각대로 잘 되지 않자 그는 결국 에로배우의 길에 들어서기로 마음먹게 된다.

에로배우의 실상
그러나 에로배우의 길 역시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명동 카사노바’의 성공으로 수많은 러브콜을 받으며 탄탄대로에 들어섰지만 에로배우는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대사를 하는 것이 무척 곤혹스러웠다”는 그는 차마 대본대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 말했다가 감독에게 지적을 당한 적도 많다며 웃었다. 무엇보다 사회의 시선은 너무도 따가웠다. “옷을 벗고 카메라 앞에서 적나라한 연기를 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었다”는 신씨는 “벗는 연기에 회의가 들어 영화를 찍고 몇 달씩 잠수를 한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신씨로부터 에로배우의 적나라한 실상에 대해서도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에로틱한 연기를 하다보면 간혹 사적인 감정이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털어놓은 얘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배우들끼리 눈이 맞는 경우도 흔하다”는 그는 “작품을 찍고나서 아예 방을 얻어 동거에 들어가는 사례도 여럿 봤다”고 귀띔했다.신씨는 또 일부 에로배우들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일하는 파트너로서 끝나지 않고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켜 상대배우들과 문란한 관계를 맺는 이들도 있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또 막연한 호기심으로 혹은 단기간에 목돈을 만들기 위해 발을 들였다가 상처만 받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배우들도 많다고 전했다.

야구에 대한 애착 여전
자신의 지난 날에 대해 담담히 얘기하면서 그는 종종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야구 얘기가 나오자 그의 눈은 순식간에 빛났다.“요즘 초등학생들에게 야구를 지도하고 있다”는 그는 “다시 선수로 돌아간 기분이다. 정말 다시 사는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잘 나갈 때 월급의 10분의 1도 못받지만 정말 보람있다”는 것이 신씨의 말이다.“나는 취미도 야구, 특기도 야구”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신씨는 오랜 방황을 끝내고 다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또 그는 여전히 배우에 대한 꿈을 접지 않고 있다.지난해 개봉한 ‘슈퍼스타 감사용’에도 출연한 바 있는 그는 앞으로 비록 작은 역할일지라도 성실히 임하며 배우로서의 꿈을 펼칠 계획이다. 내년말경엔 야구관련 영화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기자에게 사회인 야구시합을 하는데 구경오라고 말했다. “또다른 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다시 야구공을 잡게 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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