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부터 강남 압구정과 청담동 일대에 ‘텐트바’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텐트바란 낮에 주차장이나 카센터였던 부지에 밤에 천막을 쳐서 영업하는 포장마차를 일컫는 용어이다. 그러나 텐트바를‘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린 남성들이 퇴근길에 잠시 들러 소주나 한잔하고 가는 곳’으로 여기면 큰 오산이다. 강남의 포장마차는 독특한 지역색을 나타내며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았다. 텐트바를 찾는 강남의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강남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지난 1월 22일 밤 10시. 학동사거리 인근에 밀집해 있는 포장마차들은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가게 앞에는 간이식 발레 파킹 비닐부스가 있고 대리운전업체전화번호 현수막이 걸려있다. 본격적으로 청담동의 주말밤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청담동의 한 포장마차 앞.대로변에는 벤츠와 BMW, 페라리와 같은 최고급 외국산차량 일색이다. 포장마차 앞에는 이미 주차공간이 없다. 어정쩡하게 대로변에 차를 세우려고 하니 비닐부스앞에서 난로를 쬐고 있던 젊은 주차요원 중 한명이 순식간에 달려나온다. 곧바로 능숙한 솜씨로 차를 몰아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해준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나 볼 수 있는 유료 발레파킹이 이곳 포장마차에서도 이뤄지는 것이다.

텐트바
주황색 천막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먼저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확 트인 공간이 족히 100평은 되어보인다. 넓은 가게안은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고 음악소리가 요란하다. 가게 한 켠에 있는 대형 스크린 TV에서는 최신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빽빽하게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테이블 사이사이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아르바이트생들이다. 음식을 만드는 주방 사람들을 제외한 아르바이트생과 주차요원만해도 어림잡아 10명은 넘어보인다. 이곳은 강남의 여느 술집이나 레스토랑처럼 고급스런 분위기도 아니고 화려한 인테리어 하나 없다. 오히려 둥그런 철제 테이블에 등받이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가 빽빽하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텐트바는 일반 포장마차와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을 갖고있다. 젊은층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메뉴가 눈길을 끄는데 칠리 새우나 치즈 계란말이 같은 퓨전메뉴가 주를 이룬다는 점도 텐트바만의 특징이다.그래서인지 이곳은 매일저녁 사람들로 북적댄다. 자리가 없어 줄지어 기다리거나 그냥 돌아가는 경우도 흔하다.

연예인에는 무관심
밤 12시가 넘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 들어왔다. 탤런트 A와 가수 B가 나타난 것. 그러나 그 누구도 갑작스러운 연예인의 출현에 동요하지 않는다. 청바지와 자켓차림의 그들은 주위에 신경쓰지 않은 채 들어와 자리에 앉았고 그들의 옆에 앉은 손님들 역시 그들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술을 마신다. 이것이 바로 이곳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강남 일대의 포장마차가 유명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처럼 유명인들이 많이 찾기 때문이다. 또 업소 사장들 중에는 전현직 연예인 매니저들도 많아 일을 마친 연예인들이 자주 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몇몇 업소는 연예인이 직접 경영하기도 하는데 운이 좋으면 연예인이 직접 서빙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특히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는 TV에서나 볼 수 있던 연예인들을 이곳에서 보는 일도 흔한 일이다. 공중파에서 화려한 외모로 등장하던 연예인들도 이런 곳에 올 때는 대부분이 야구모자에 편한 캐주얼 차림이다. 또 스타크래프트를 타고 매니저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동료 연예인이나 측근으로 보이는 일행들과 와서 소주잔을 기울인다. 이곳을 즐겨 찾는다는 대학생 김모(24·여)씨는 “포장마차의 낭만이 있으면서도 트렌디한 분위기가 좋아 젊은이들에게 인기다. 화장실도 수세식이라 더욱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기는 단골 연예인들도 굉장히 많아서 연예인을 바로 옆에서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정말 좋아하는 연예인을 코앞에서 본적도 수차례지만 나와 내 친구들 같은 경우 사인해 달라거나 먼저 접근하는 촌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이곳을 찾는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어느 기획사앞에 죽치고 있는 중고등학생처럼 연예인을 보자마자 달려드는 모습은 비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연예인이 워낙 많이 오다보니 연예인들이나 일반인들이나 아예 서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나이트 손님 북적
새벽 1시. 다른 텐트바를 찾았다.운 좋게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아르바이트생이 숟가락이 꽂힌 국물그릇을 들고 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손님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나이트 가기 전후나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울 때 들르기에 최고죠.”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대학생 서모(27·남)씨의 말이다. 인근의 유명 나이트에 가기 전 친구들과 단합을 꾀하고 부킹의 결의를 다지는 자리로 종종 이용하곤 한다는 게 서씨의 말이다. 그는 “인근의 나이트에서 놀다가 마지막으로 한잔 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새벽 3~4시에도 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전했다.서씨는 “ 특히 여자끼리 오는 손님들이 많은데 솔직히 웬만한 나이트보다 물이 훨씬 좋다”며 “새벽에 찾는 여자들중에는 이미 나이트나 다른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오는 여성도 있어 자연스레 합석을 시도하거나 나갈 때 뒤따라 나가서 합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서씨는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한번은 나이트에서 눈에 확 드는 여성을 만나지 못했던 서씨와 그의 친구들은 그냥 집에 가기 아쉬워 H텐트바를 찾았다.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옆테이블에 서씨 일행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성들이 술을 마시고 있더라는 것. 서씨의 표현에 따르면 그녀들은 눈에 확 들어올 만큼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지 못한 채 나왔던 서씨 일행은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녀들 역시 나이트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서씨는 “남녀가 눈 맞는데 나이트건 포장마차건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며 “그녀들이 술을 많이 마신 상태라 그런지 의외로 쉽게 넘어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꼬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들이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다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강조했다.서씨는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신 그녀들과 제각기 눈이 맞은 상태라 광란의 밤을 보냈다”며 “나는 내 파트너 여성과 아침에 같이 해장까지 하고 헤어졌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늦은 새벽녘에는 일을 마친 일명 ‘나가요’들이 몰려들어 한차례‘물갈이’가 이뤄진다”고 귀띔했다. 강남의 텐트바는 밤마다 새로운 사연을 쏟아내며 출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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