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8일은 63년 전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평양의 내무성 정보처에서 총살된 날이었다.
‘古堂기념사업회’는 이 날을 순국일로 추도한다. 불굴의 신탁통치 반대로 소련과 북한 추종세력에 의해 1946년 1월5일 구금 된지 4년9개월만의 순국이었다.

차제에 고당의 인물초상화가 우리 화폐에 등재되어야 함을 제언코자 한다. 이유는 다섯 가지다.
첫째, 고당은 항일독립운동가로 1920년대 초반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 일본 상품 불매와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쳤다.
그는 “조선 물산을 먹고, 입고, 팔고, 사고, 씁시다. 싸든지 비싸든지, 곱든지 어떻든지 우리 물산으로 살겠다는 각성”이 요구된다고 역설했다.
물산장려 운동이 확산되어 가자 화류계의 기생들도 비단옷을 벗고 무명치마와 무명 저고리를 입었으며 패물을 사회단체에 헌납했다. 한민족 사상 최초의 국산품 장려운동 주역인 고당의 초상화는 화폐에 새겨져 물산장려 정신을 후세에 환기시켜줘야 한다. 사회가 국제화 되면 될수록 한민족의 혼을 지키고 “조선 물산을 먹고, 입고, 팔고, 사서써야 한다”는 데서 그렇다

둘째, 고당은 비폭력·비협조를 항일독립운동의 기본으로 삼았다.
일본 기관 및 관련 단체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오산학교, 숭실학교, 숭인상업학교, 조선일보 등 순수 우리 민족설립 기관에서만 봉사했다. 일본 관헌과의 대화에서는 일체 일본 말을 쓰지 않고 통역케 했다.
고당의 비폭력·비협조 항일운동은 인도의 모한다스 간디의 항영(抗英)운동에 영향을 받았으며 간디를 연상케 한다. 고당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오늘날에도 폭력시위로 해가 뜨고 저무는 우리사회의 피 묻은 시위현장에 값진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고당은 8·15 해방 공간에서 신탁통치 반대와 자유민주주의의를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다. 백 섬 지기 부농의 아들, 평양 포목점의 15세 상점주, 장기간의 동경 유학, 독실한 기독교 신앙 등을 거치면서 고당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은 체질화됐다. 소련 당국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인다면 ”조선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고 회유했지만, 고당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자유민주를 위해 거부했고 그 죄로 공산당에 의해 참혹하게 처형됐다.

넷째, 고당에게는 국민 대동단결 정신이 강렬했다.
동경 유학시절 한인 교회에서 감리교와 장로교 신자들이 따로 예배를 보자, 양측을 설득해 하나의 예배로 합치게 했다.
동료 유학생들에게는 “고국에 돌아가거던 피차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해 나갑시다”고 되풀이 강조했다.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는 “서울과 평양이 행동을 같이 하자”고 호소했다. 지역감정, 세대갈등, 이념대결 등으로 분열과 대결이 격화되고 타협과 협력이 거부되는 우리 현실로서 고당의 대동단결 정신은 화폐에 새겨져 되살아나야 한다.

다섯째, 고당은 언행일치의 고결한 성품을 지녔다. 물산장려운동을 이끌면서 무명옷만 입었고 오산학교 교장 시절 겨울 철 화장실 오물이 얼어 넘쳐나면 손수 치웠다. 조선일보 사장 때엔 매일 10전 짜리 국수로 점심을 때웠고 고급 요정출입도 거부했다. 평양 구금 당시 서울로 갈 것을 권유받았을 때 마다 “나는 북한 1000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라며 죽음을 택했다.
부인 전선애 여사에게는 “이남에 가거들랑 고당 가족이라고 남에게 폐가 될 행동은 피하시구려” 당부했다. 고당의 숭고한 언행일치는 후세에 길이 기억되어야 한다.

고당의 물산장려, 비폭력비협조 저항운동, 자유민주주의, 대동단결, 언행일치 정신은 우리의 정신적 근간으로 채워져야 한다. 고당의 초상화는 화폐에 새겨져 그의 잊혀진 고결한 정신을 되살려낼 필요가 있다.
고당처럼 물산장려운동과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친 간디의 초상화는 인도 화폐에 새겨졌다. 고당 초상화도 우리 화폐에 오래 전에 등재되었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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