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년 새해를 맞이하고 있는 거물정치인들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거물 정치인들은 다름아닌 김영삼(YS)·김대중(DJ) 전대통령과 김종필(JP) 전자민련총재, 이회창 전한나라당총재 등이다. YS DJ JP 등 이른바 ‘3김’으로 통했던 이들 세 사람은 지난 60년대 중반이후 40여년간 특정지역을 볼모로 무소불위의 권력과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 전총재 역시 정계입문 이후 오랜 기간 제1야당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막강한 정치적 파워를 과시해 왔다. 하지만 지난 2002년 대선과 17대 총선을 거치면서 이들 거물 4인방은 정계를 떠났다. 이들의 정계은퇴와 함께 40여년 한국정치를 주름잡았던 이른바 ‘3김정치’도 사실상 종식됐다. 그렇다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완전히 소진된 건 아니다.

3김식 아류정치가 아직도 현실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3김 정치’ 청산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얘기는 아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전부터 크고 작은 선거철만 되면 정치권은 한결같이 ‘3김정치’ 청산을 외쳤다. 하지만 17대 총선전까지 JP는 현실 정치를 떠나지 않았고, YS와 DJ도 비록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그들을 추종하는 이른바 ‘3김식 정치’가 정치권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탓에 ‘3김 정치’ 청산은 공허한 메아리에 머물고 있었다.어쩌면 이들 3김의 정치적 영향력과 후광을 등에 업고 정치적 입지 확대를 도모하려 했던 아류 정치인 및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3김 정치’ 청산을 미뤄왔는지도 모른다. 참여정부 출범이후 전개된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잔류파와 신당파가 앞다퉈 퇴임한 DJ에게 구애의 손길을 내밀었고, 전당대회 등을 통해 새로운 여야 지도부가 탄생할 때마다 이들 지도부는 여야를 망라하고 YS와 DJ를 찾았다.

또 해마다 새해가 밝아오면 상도동(YS)과 동교동(DJ)에는 신년하례차 방문한 정치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겉으로는 ‘3김 정치’ 청산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끌어안으려고 했던 정치권의 아이러니한 현 주소를 잘 반영하고 있는 사례들이다.을유년 새해에도 이들 거물정치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유감없이 현실화됐다. 전·현직 의원들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새해인사차 이들 거물들의 자택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다만 DJ와 이 전총재의 집앞은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으나 YS와 JP는 상대적으로 한가로운 새해를 맞이했다. 물론 방문객 인사들 면면과 숫자가 정치적 영향력과 비례하지는 않지만 을유년 새해를 맞이한 거물 4인방의 자택 분위기는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DJ와 이 전총재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두 사람의 사저에는 새해 벽두부터 신년인사 및 세배를 하기 위한 정·관계 인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지난 1일 동교동 DJ의 자택은 청와대 관계자를 비롯한 여권 실세, 민주당과 동교동계 인사 등 신구 실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오전 9시30분 민주당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주요 당직자들의 첫 방문을 시작으로 오전 10시20분에는 열린우리당 이부영 전의장과 김혁규 이미경 유재건 의원 등이 방문했다.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열린우리당 염동연 의원과 최규성 의원 등 초선의원들이 새해 인사를 했고, 이해찬 국무총리와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 이종찬 전국정원장, 동교동계 인사(김옥두·장재식·설훈 전의원) 등도 DJ를 예방하고 환담을 나눴다.지난 2002년 대선 패배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이 전총재의 옥인동 자택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안상수 인천시장,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 이병기·이종구 전특보 등 전·현직 당직자들이 신년 인사차 옥인동을 방문했다.

이처럼 신년 벽두부터 DJ와 이 전총재 자택에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방문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직도 건재함을 입증하고 있다.실제로 DJ는 ‘대북특사’ 등 남북문제 역할론과 맞물려 청와대 등 여권내 다양한 채널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또 재건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민주당도 DJ의 역할론을 기대하며 그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전총재도 향후 정국주도권 경쟁 및 대권구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전총재가 남대문로에 개인사무실을 내고 정치활동 재개를 위한 정지작업에 들어간 것도 그의 역할론과 무관치 않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전총재가 대권 3수에 도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DJ와 이 전총재가 건재한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반면 YS와 JP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급락하고 있는 형국이다.

YS와 JP는 정계은퇴후 사법처리설(YS- 안풍사건, JP- 불법 정치자금 사건)이 나돌 정도로 위기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사법처리는 모면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새해 첫날 DJ와 이 전총재의 사저가 정·관계 인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반면 두 사람은 가족들과 함께 조용히 보냈다는 사실은 이 두 사람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다. 특히 정계은퇴 후 야인으로 처음 생일(79회)을 맞은 JP는 생일 당일(1월3일)날 축하 방문객을 일절 받지 않고 청구동 자택에서 가족 및 친지들과 조촐하게 보냈다. 13일 77회 생일을 맞은 YS도 특별한 계획없이 오전에 가족과 함께 예배를 보는 등 조용한 생일을 보냈다. YS와 JP측에 따르면 방문객이나 축하 화환 등을 일절 접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정치사의 산 증인인 두 거물정치인의 조촐한 생일은 권력의 무상함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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