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로동당 행정부장이고 김정은의 고모부이며 40년 권력의 핵심이었던 장성택이 재판의 기본절차도 없이 즉결 처형되었다. 지난 12일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의 판결문은 “흉악한 야심가, 음모가이며 만고역적인 장성택을 혁명의 이름으로…”라고 규탄하면서 공화국 형법 제60조(국가전복 음모)에 의해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하였다. 사형은 “즉시 집행됐다”고 공표했다. 그 밖에도 특별군사재판소의 판결문은 장성택의 주요 죄목으로 김정은의 유일 후계 추대를 방해한 대역죄, 내각 총리에 앉을 개꿈, 자본주의 날라리풍 선동, 군대 동원 통한 정변책동, 군대에까지 손 뻗쳐 등을 열거하였다.
북한 전문가들은 장의 처형이 김정은의 경제 실패와 주민 생활의 궁핍 책임을 덮어씌우려는 데 있다고 했다. 군부 강경파의 득세를 반영한다고도 했다. 김정은의 처 리설주를 통해 섭정하려다 김의 분노를 샀다는 말도 있다. 김정은 정권의 붕괴 서곡이란 예측도 나왔다.
그러나 김정은이 경제 실정과 주민 생활난의 책임을 장성택에게 떠넘기려 했다면 고모부를 사형 집행까지 하지 않고 실각으로 충분했다. 리설주를 통해 섭정하려다 김의 분노를 샀다면 그것도 실각으로 족했다.
하지만 장성택의 처형은 장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교조주의 추종세력을 거세하고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처럼 실용주의로 나가려다 발각돼 처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죄목으로 ‘대역죄’ ‘내각 총리에 앉을 개꿈’ ‘자본주의 날날이풍’이 나열되었다는 데서 그렇다. 장은 덩샤오평 ‘개꿈’을 실현하려다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毛澤東)이 1976년 9월 9일 병사하자 한 달 만인 10월 6일 군을 잽싸게 동원해 마오 후계자이며 그의 처인 장칭(江靑)을 비롯한 교조주의 추종자 4명(4인방)을 체포했다. 덩샤오핑은 2년 후 실용주의에 바탕을 두고 개혁·개방을 과감히 단행, 급기야 중국을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키울 수 있는 시장경제 기반을 닦았다.
장성택도 김정일이 사망하자 28세의 애숭이 처조카 김정은을 후견하면서 덩샤오핑식 실용주의 개혁·개방을 기도했던 것 같다. 서울로 망명한 고 황장엽 로동당 비서는 장성택이 “북한을 개방·개혁으로 이끌기에 가장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장은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녔고 중국과 가장 가까이 지내며 중국 실용주의 성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성택은 덩샤오핑같이 단호하지 못했고 군 경력과 군부의 추종세력도 없어 쿠데타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장은 군부 세력에 까지 손을 뻗쳐 가며 지지세력을 키워가던 중 적발돼 ‘만고의 역적’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결국 장은 어설프게 실용주의 ‘개꿈’을 실현하려던 중 북한의 65년 다져진 1인독재 그물망에 걸려 체포되고 말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장성택의 처형으로 김정은 권력은 ‘붕괴의 서막’으로 접어들었다고 예측했지만, 그의 권력은 더 한층 견고해 질 게 분명하다. 김일성은 1950년대 허가이 등 소련파와 박헌영 등 남로당파를 숙청하고 권력기반을 더욱 견고하게 다졌다. 그뿐만 아니라 소련의 요제프 스탈린도 1930년대 중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을 공개재판으로 처형한 뒤 공포정치로 권력기반을 더욱 더 든든하게 굳혔다.
현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김정은이 장성택 처형을 계기로 과대망상증, 무모성, 잔혹성, 예측불허성 등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그는 갑자기 장성택을 처형했듯이 언제 대남 도발을 감행할지 모른다. 특히 어린 나이에 무모하기 짝이 없는 김정은이 핵무기를 손에 쥐고 있다는 데서 대한민국으로서는 더더욱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철저한 경계태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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