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쿠데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검찰의 수사기록 일부가 공개됐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12월17일 사건기록 9만여쪽 가운데 국익 및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있는 부분 등을 제외한 5만여쪽을 청구인인 정동년 전 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측에 전달했다. 정동년 전 의장을 대신해 광주 5·18기념재단 자료담당 직원 김점옥씨가 전달 받은 자료는 작은 수레 2대 분량이었다. 하지 만 청구인측은 검찰의 기록 공개 수위에 반발해 추가 소송을 검토중이라고 밝혀 군 작전일지 등 미공개 자료를 둘러싼 논란의 불씨는 살아있는 상황이다. 청구인측은 이번에 공개된 자료를 5·18기념관에 보관할 계획이다. <일요서울>은 독자들의 알권리 충족 차원에서 최근 입수한 ‘5·18사건 수사 기록’ 중 주요부분을 요약 게재한다.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 자술서(1996년 1월 13일)저는 1980년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으로 근무하면서 직책상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 과정에 관여한 사실이 있는데, 이에 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주영복, 신현확 등은 「국회해산」이었다고 주장하나 제 기억으로는 「정치활동 규제」라고 표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시국수습 방안은 1980년 5월 초순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전두환의 정국장악과 시국수습을 위해 저의 정보처에서 마련한 것으로, 그 방안의 수립과정에서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도영 등과 수시로 만나 협의했습니다. 1980년 5월 4일경에는 허화평이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등 이른바 12·12사태 핵심 장성들을 보안사로 초청하여 협의를 하는 등 「경복궁 모임」참석 장성들과도 몇 차례 협의를 거쳤습니다.

둘째, 허화평 비서실장은 보안사령관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대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참모들도 어떤 정책을 입안하여 사령관의 결재를 득하려면 사전에 허화평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야 했습니다. K공작계획(언론사 통합 및 언론인 숙청작전)수립, 해직대상 언론인 명단작성, 언론사 통폐합 방안 마련 등의 조치는 허화평, 허삼수 등의 지시에 따라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저는 사전에 이상재에게 그러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없습니다.국보위는 제안당시부터 대통령 긴급조치권을 발동한 비상권력기구로 논의되었으나 최규하 대통령 등의 반대로 대통령령에 의한 대통령 자문 보좌기구로 설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보위 위원 및 상임위원은 전두환이, 분과위원은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이 주로 추천했습니다.헌법개정은 1980년 7월 전두환의 지시로 국보위 법사분과위원(우병규, 박철언)을 보안사로 불러 대통령 선출방식, 임기 등에 대하여 연구케 하고 그 안을 정부 개헌특위에 반영케 했습니다.민정당 창당은 1980년 6월 하순 전두환이 저와 이종찬, 윤석순, 이상연, 이상재 등을 불러 창당작업을 지시했습니다. 이상 사실대로 진술했습니다. 1996년 1월 13일 권정달.

박동원 당시 수경사 작전참모의 중앙청 포위, 위력시위 증언

※진술조서(요약): 박동원(1980년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에서 수도경비사령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수도경비사령부와 충정훈련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요.▲수도권 소요사태시 경찰병력으로 진압이 불가능할 경우 수도경비사령부가 그 진압을 대신 맡습니다. 이에 대비한 훈련이 충정훈련인데 수도경비사령부 자체 병력만으로 부족하므로 수도권 주변의 20, 26, 30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을 배속받아야 합니다.

- 국무회의장 주변의 병력배치는 누구의 지시였나요.▲5월 17일 17시경 본인이 노태우 사령관으로부터 “중앙청에서 국무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외부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도록 내외곽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받고 30사단 이현우 대령에게 내외곽 경비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 중앙청 병력배치와 관련하여 보안사 참모들과 접촉이나 전화통화 등을 한 일이 있나요.▲노태우 사령관의 지시를 받았을 뿐 보안사 사람들과의 접촉은 없었습니다.

-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가택연금에 동원된 병력도 수경사 병력인가요.▲당시 배치된 병력이라면 수경사 병력이 틀림없습니다.

- 정치인을 체포, 연금하는 일에 군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이는데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했나요.▲수경사는 합수부의 병력지원 요청이 있을 경우 이유 불문하고 지원합니다. 당시의 사정을 판단할 입장이 못됩니다.손주항 의원이 체험한 계엄군의 국회 봉쇄※진술조서 : 손주항 전 신민당 의원(1996년 1월 4일)

- 신군부가 김대중, 김종필, 김동길, 이후락, 박종규 등 주요 정치인 26명을 체포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가요.▲그 당시 위 정치인들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신군부가 정권을 잡는데 걸림돌이 되는 주요 정치인 26명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체포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 진술인이 5월 20일 11시경 국회의사당으로 임시국회 참석차 등원하려다 저지당하고 구타까지 당했다고 하는데 그 경위를 진술하시오.▲10시 30분경 국회의사당에 도착해보니 다른 의원들은 아무도 없고 국회사무처 직원, 기자 등 30여명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정문을 비롯하여 주위에는 무장군인들이 전차 2대를 동원하여 정문을 완전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인데 임시국회에 등원해야겠다고 했더니 병사 30여명이 상부의 지시로 아무도 국회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이에 제가 항의하고 있을 때 오세웅 신민당 의원이 도착해서 함께 항의했습니다.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사병들이 개머리판으로 저의 어깨를 돌려치면서 밀어냈습니다. 한참 후 상도동계 의원들 20여명이 몰려와 저희들과 함께 항의하며 밀고 당기고 난리를 쳤던 것입니다.

- 현장에 있던 계엄군의 책임자는 누구였으며 상급자를 만나거나 연락을 취했나요.▲상급자와 연락을 취한 일은 없고 단지 정문에서 “상급자 나와”하고 고함을 치자 장교 3명 정도가 나와서 상부의 지시라고 말만 했고, 책임자가 누구라는 얘기도 없었습니다.

- 계엄군의 국회출입 봉쇄는 완강하던가요.▲사병들은 일체 말이 없고 무조건 정문을 봉쇄하고는 자기들이 지키는 선을 침범하면 개머리판으로 휘둘러 치고 밀고 했습니다. 정문에는 전차와 장갑차를 배치하고 포신은 앞을 향하고 장갑차 탑의 기관총은 저희들을 향해 조준한 상태로 살벌했습니다.

- 피의자 전두환은 국회의사당에 진주한 계엄군의 실수로 의원들의 국회등원을 저지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인가요.▲혁명, 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국회와 언론기관을 점령하는데 전두환이 계엄군의 실수로 저지했다고 진술한다면 치졸한 변명이고 실수라고 하는 말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진술입니다.

김영택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 증언
“시위대 5백명 신군부측서 의도적 투입”

김영택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의 5·18※진술조서: 제2회 1996년 2월 7일 요지

- 진술인은 5·18 사태와 관련하여 당청에 왜 서신을 우송했나요.▲서신내용과 같이 5·18광주사태는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다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광주시민들을 폭도화시킨 후 이를 진압함으로써 결국 정권장악에 이르게 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에 대한 근거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서신을 우송했습니다.

- 왜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정권장악을 위해 광주사태를 유발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라고 생각하나요.▲5월 22일 항쟁본부에서는 500여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광주항쟁 지원차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방송을 했는데 당시의 상황은 광주가 철옹성처럼 봉쇄되어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다수의 대학생들이 광주시내로 들어왔는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신군부가 의도적으로 투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진술인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이라고 하는데 시위현장에 투입된 상황을 직접 보았나요.▲예. 제가 당시 취재하면서 위와 같이 항쟁본부에서 스피커를 통해 발표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그 당시 도청 앞 광장에 20~30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고, 서로간에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습니다.

- 진술인은 광주사태가 전두환 등 신군부 측의 사전음모 사건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계엄사가 주도하여 재야인사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하도록 당부하는 성명을 신문에 싣지 못하게 하거나 작게 싣도록 한 점. 김대중과 만나지도 않은 정동년을 김대중 배후조종에 의한 5·18주동자로 몰아 사형선고까지 한 점. 시위와 관련없는 신혼부부나 가정주부들까지 마구 구타하며 연행한 점. 선량한 시민들을 시내로 몰아넣고 총질을 마구 한 점. 시위 자제를 결의한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하는 등 시위를 오히려 자극한 점. 정권찬탈 계획 누설이 두려워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 회의록 등 9건의 군작전관계서류를 없애 버렸다는 점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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