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간은 나병에 효험 있다?

1900년 11월 9일 전라남도 남원군 남생면에 사는 김판술의 6세 아이 왜춘이가 점심을 먹은 후 친구 잉수와 함께 놀러나갔다. 그런데 해가 저문 후에 어떻게 된 일인지 잉수 혼자만이 돌아왔다. 잉수는 혼자 돌아온 이유를 자신의 할머니에게 “왜춘이랑 함께 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삽을 들고 와서는 왜춘이를 업고 가려했다”며 “왜춘이가 가려고 하지 않자 삽을 든 사람이 돈을 쥐어 주면서 사탕을 사먹으라고 꾀어 업고 갔다”고 설명했다. 잉수의 할머니는 즉시 왜춘이의 아버지 김판술에게 이를 전했다. 그러나 김판술은 아이가 예뻐서 업고 간 것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해가 어둑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자 점점 걱정이 됐다.

이에 김판술은 잉수와 함께 놀러 갔던 곳을 둘러보았는데 이웃 마을 이여광이 삽을 매고 논둑에 서있는 모습을 보았다. 김판술은 그에게 ‘우리 아이가 이곳에서 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업고 갔다고 하는데 자네가 혹시 보았는가?’라고 물었지만 이여광은 ‘못 보았다’고 말했다.김판술은 ‘자네가 와서 논에 물을 댄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애가 여기서 논 것은 얼마 전일세. 그런데 어찌 못 보았다고 하는가?’라고 재차 물었다. 하지만 이여광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의심이 생긴 김판술은 잉수를 직접 데리고 와 이여광이 왜춘을 업고 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잉수의 말을 들은 순간 김판술은 ‘이여광 네 집안에 문둥병 환자가 많고 또 속설에 아이의 간이 효험이 있다 하니 우리 애가 저 놈에게 해를 입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같은 의심은 현실로 나타났다. 김판술이 잉수를 앞세워 왜춘이를 업고 갔다는 길을 따라 갔다. 산 뒤에 흙이 흘러내린 흔적이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바로 그곳에 왜춘이의 배가 갈라져 간이 밖으로 나와 있는데 반만 있고 반은 없어진 상태였다. 분노가 치민 김판술은 이여광의 집으로 달려가 이여광을 결박하고는 ‘네놈이 우리 애를 죽이고 간을 내어 뜯어먹었느냐, 네 병든 동생에게 먹였느냐?’고 다그쳤다. 이여광은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결국엔 ‘이 몸이 병이 점점 심하여져서 먹은 것이니 내 병든 동생은 관계없소’라고 실토했다.

분을 참지 못한 김판술은 결국 이여광을 살해했고, 이여광의 사체에서는 간을 씹어 먹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병을 앓고 있던 환자들이 많았던 이여광의 집안에서 자살 사건이 터진 것. 이군필은 형 이여광이 아이를 죽인게 자신때문이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겁이 나 도망갔다. 그러나 며칠 뒤 마을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고, 나병을 앓고 있던 사촌 이판용 역시 이같은 소식을 접한 뒤 겁을 먹고 병이 덧나 죽고 말았다. 잘못된 상식으로 인한 살인과 그에 따른 복수극은 마을 사람들의 합의하에 덮어두었지만, 흉흉한 소문을 탐문한 끝에 이같은 사실이 밝혀져 사건당사자들이 처벌받았다.

친정 가고 싶어 남편을 죽인 아내

1901년 11월 강원도 양구에서는 남편 김암회를 아내 김여인이 밤에 잠을 자다 허리띠로 목졸라 숨지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김여인은 남편을 죽인 뒤 태연히 시어머니 방으로 가 ‘남편이 숨을 쉬는 소리가 없다’고 말했다. 놀란 시어머니 방여인은 사랑채에서 잠을 자고 있던 남편 김우여에게 ‘며느리 방에서 지금 큰 변고가 일어났다’고 말한 뒤 함께 아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아들 김암회의 숨은 끊어진 뒤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발견됐다. 김암회의 목덜미에 허리띠가 있었던 것. 방여인은 즉시 며느리 김여인에게 이유를 물었다.

이에 김여인은 ‘시가에 사는 것은 평생 원치 않는 일이었다’며 ‘남편이 없어진다면 친정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허리띠로 목을 졸라 죽였다’고 이실직고했다. 외아들을 비명에 잃게 돼 김우여와 방여인은 분이 치밀어 올라 며느리를 당장 죽이고 싶었지만 참고 다음날 새벽 이웃을 통해 김여인의 친정에 며느리가 병이 생겼다고 전갈을 보냈다. ‘80세의 시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시댁에 갔다가 새벽에 돌아온 친정어머니 김여인은 사위가 비명횡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곧장 사돈집으로 향했다. 집안에 통곡소리가 가득했고 딸이 결박돼 있는 모습을 본 김여인은 사돈으로부터 사위를 죽인게 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딸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김우여가 ‘이미 아들이 죽는 참악을 보았는데 어찌 또 변고를 다시 보겠는가. 집에 데리고 가서 마음대로 처분하시오’라고 말하면서 사위를 목맬 때 사용한 허리띠를 내어주었다. 김여인은 딸을 데리고 사돈집에서 5리쯤 가다가 가지고 있던 숙마끈과 김우여의 집에서 가지고 온 허리띠로 딸의 목을 매어 죽이고 길가에 그대로 둔 채 치마로 덮어두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김여인은 관아에서 “모녀간 정의가 비록 소중하오나 남편을 죽인 자는 사람이 지켜야 할 근본적인 도리를 범한 죄이므로 살아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며 “오히려 죽는 것이 무방할 듯하므로 스스로 판단하여 죽인 것이다”라고 항변했다.

‘사안’ 끝에 밝혀낸 의문사의 진실

끈질긴 수사 끝에 범인을 밝혀낸 사례도 있었다. 1895년 5월 17일 경상도 김해군 본면 시만리에 사는 박인순이 술에 취해 강변에 갓을 벗어 놓고 빠진 채 발견됐다. 스스로 강에 빠져 자살한 것으로 추정됐던 사건을 박인순의 동생 박만순이 의혹을 제기했다. 박만순은 분고를 통해 “형 인순이 상처한 후 과부였던 이여인을 배필로 삼았는데 이여인의 행실이 정숙하지 못해 김응칠의 의붓아들 이진안과 정을 통하였다”며 “이진안 모자가 심히 유감이 있어서 계속 우리 형을 욕하고 책망하니 형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김응칠의 집에 가서 응칠과 싸웠다”고 말했다 박인순의 아들 박학조도 법에 따라 아버지의 한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사건의 내용인 즉 박인순과 이진안은 한 마을에 살며 평소 절친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가 어긋난 것은 박인순의 부인 이여인과 이진안이 정을 나누게 된 사실이 들통나고서였다. 이여인은 이진안이 강제로 자신을 탐했다고 했지만, 이진안은 이여인이 먼저 자신을 유혹했다고 상반된 주장을 했지만 정을 통한 사실은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결국 이진안은 양부모 김응칠, 한여인과 함께 마을에서 쫓겨났다. 이후 이들의 불편한 관계가 이어지다 술에 취한 박인순이 김응칠의 집에 찾아가 시비가 붙었고 싸움이 일어난 뒤 박인순이 강변에서 숨진채 발견된 것. 그러나 이 사건을 두고 초검관과 복검관의 의견이 달랐다. 초검에서는 박인순과 김응칠의 행적에 대해 목격자들과 주변사람들의 증언이 한결같이 박인순의 자살이라고 나오자 자살로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복검에서는 박인순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었던 점등을 들어 자살로 판단하기엔 의문이 많다고 지적했다.

또 검험을 통해 박인순의 사인은 구타에 의한 사망이라고 나왔다. 감영은 초검과 복검의 의견이 틀리자 삼검을 실시했다. 하지만 삼검은 박인순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판단 초검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이에 감영은 사안까지 했고 결국 진실은 밝혀졌다. 사안 조사관은 박인순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진술한 관련자들의 말은 신빙성에 문제가 많고 모두 남에게서 들은 말이라는 점을 들어 사건 당사자들간의 대질 등 강도높은 재조사 끝에 김응칠과 사건 목격자들이 입을 맞췄음을 밝혀냈다. 결국 사안까지 가는 조사 끝에 박인순은 김응칠이 구타하여 사망케 한 뒤 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위장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 한 민초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한 당국의 끈질긴 노력으로 해결한 사건이었다.

검안이란 "시체검사·관련자 신문조사 보고서"

검안이란 조선시대에 사망한 사람의 시체 검사 소견서이며 법의학적 판결문인 시장(屍帳)을 포함, 사건 관련자들을 신문한 일체의 법정 조사 보고서이다. 조선시대에는 인명 사건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사건 관련자들을 신문한 뒤 그 내용을 기록했다. 살인사건의 경우 그 중요성 때문에 각각 다른 조사관들이 두 번의 조사를 진행했다. 사건 해당지역의 군수가 1차 조사자(초검관)가 되고 2차 조사자(복검관)는 보통 인근지역의 군수나 수령이 맡았다. 그러나 초검관은 1차 조사 때의 사정을 누설하지 못하게 해 복검관은 별도로 조사한 뒤 상부에 보고했다.

이를 토대로 상부에서는 1, 2차의 내용이 서로 일치하면 사건을 종결했고 의심이 가면 3차조사(삼검)를 실시했다. 특히 조선시대의 검안자료는 사건 관련자들을 소환하여 신문하고 취조한 내용을 그대로 기록해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각종 고서 및 고문서 목록집인 ‘규장각한국본종합목록’에는 거의 600종에 달하는 검안류 자료가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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