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다시 부활하고 있다.’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 ‘마이 라이프(My Life Bill Clinton)’ 열풍이 뜨겁기 때문이다. 지난 6월 22일 책이 전세계 동시 출판되기 전 예약주문만 무려 200만부를 넘어섰을 정도다. 클린턴은 회고록에 어린시절의 삶부터 2000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날 때까지의 일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재임기간 일어났던 북핵문제와 중동문제 등 외교 비화들과 함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스캔들에 대한 클린턴의 고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클린턴 회고록의 주요 내용을 담았다.

94년 북한 핵 위기

지난 94년 6월 국내에서 ‘사재기’열풍까지 불며 전쟁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실제 클린턴 행정부는 평안북도 영변 일대의 북 핵시설을 공격하는 방안을 검토했었다. 당시에 대해 클린턴은 “94년 3월 핵위기가 시작되면서 패트리엇 미사일을 한국에 보내고 유엔에 경제제재를 요청하면서 전쟁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면서 “당시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경고를 내놓았지만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과 제임스 레니 주한대사는 평화로운 해결책을 선호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았다”고 회고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미 카터에게 핵문제 해결을 위해 방북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클린턴은 “북한 문제가 악화되는 중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6월 1일 전화를 걸어 자신이 북한에 가서 문제를 해결할 뜻을 밝혔다. 이에 앞서 3주전에 나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양측이 입을 막대한 손실에 대한 충격적인 보고서를 받은 뒤였다”고 밝혔다. 클린턴은 또 “카터는 방북 뒤 김일성 북한 주석으로부터 핵사찰 재개와 핵 프로그램 동결, 회담을 위한 다른 전제조건을 받아들인다는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으로 북한과의 합의는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제네바 회담이 한 달간 중지됐지만 10월 18일 제네바 기본 합의문을 통해 한반도의 핵 확산위협을 막는데 성공했다”고 털어놨다.

부시와의 만남과 방북좌절의 배경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북미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전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과는 상당한 견해차이를 보인 것. 클린턴은 조지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하며 “백악관을 떠나기에 앞서 후임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을 방문해 핵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알카에다가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조언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시큰둥하게 넘기며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고 회상했다. 방북이 좌절된 배경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클린턴은 “사실 2000년 12월 북한을 직접 방문해 ‘북한이 플라토늄 및 장거리 미사일 생산을 포기한다’는 협정에 서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진행되던 중동 평화협상이 있었다.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에게 ‘평화협상 의지가 없다면 북한으로 가서 다른 안보위협을 해결하겠다’고 하자 그는 ‘방북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고 고민 끝에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고백했다. 클린턴은 이에 대해 “북한을 다녀온 매들린 올 브라이트는 내가 간다면 미사일 협정을 맺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는 다음 단계를 밟고 싶었지만 중동평화가 가까워진 때에 지구 반대편에 가 있을 수 없었다. 당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면서도 중동 문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내가 엄청난 비용을 지급하고도 실패한 중동평화 협상에 끼여 들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한국에 대한 추억

클린턴은 자서전에 한국 방문에 대한 추억도 담았다. 그는 “남한에서는 한국전쟁을 끝낸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래 북한과 남한을 가르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까지 걸어가, 두 나라를 가르고 있는 하얀색 선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추고, 냉전의 마지막 외로운 전초기지에서 자기편을 지키고 있는 젊은 북한 병사를 바라보았다”고 회상했다. 클린턴은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배려에 대해 감사해 했다. 그는 “서울에서 힐러리와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손님으로 영빈관에 묵었다. 그 곳에는 실내 수영장이 있었는데, 내가 수영을 하러 들어가자 갑자기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나는 엘비스에서 재즈에 이르기까지 내가 좋아하는 많은 노래들에 맞추어 수영을 할 수 있었다. 한국의 유명한 환대를 보여주는 멋진 예였다”고 적고 있다.

르윈스키와의 스캔들

1998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모니카 르윈스키사건이 터졌다. 클린턴은 당시상황에 대해 “감출 것이 없었으므로 아무 염려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사망으로 심신이 지치고 정서가 불안한 나머지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클린턴은 탄핵을 받아 정치생활에 위기를 맞았고 가정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린턴은 “아내 힐러리와 딸 첼시에게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고백한 후 3개월 넘도록 거실 소파에서 자야 했고, 이런 생활은 탄핵과정이 끝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고 고백했다. 다행히 상원에서 탄핵이 부결되면서 정치생활과 가정생활이 다시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이에 대해 클린턴은 “내 사람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드러냈다”면서 “부도덕하고 바보 같은 일이었다”고 참회했다.

클린턴 자서전 인기 부시에 대한 실망때문?

지난 22일 전세계에서 동시에 출판된 클린턴 자서전이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다. 재임기간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스캔들로 탄핵위기까지 몰리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대통령으로 낙인찍혔던 클린턴이 새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부시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이 클린턴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클린턴 재임기간 동안 핵문제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북미관계와 중동문제도 화해무드로 바뀌게 되었지만, 부시 정권이 들어선 이후 북미, 중동문제 모두 다시 골이 깊어졌다는 것.

특히 부시의 대 테러전쟁, 이라크 전쟁의 후유증이 커 미국인들의 클린턴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클린턴의 회고록을 오는 11월 미 대선과 연관짓고 있다. 클린턴의 인기가 존 케리 민주당 대선 후보 진영에 큰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분위기다. 이 때문인지 공화당측은 클린턴 회고록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공화당계의 보수적인 단체들이 클린턴의 회고록은 읽을 가치가 없다며 반 클린턴 광고까지 제작해 방송에 내보내고 있다.클린턴의 인기는 부시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분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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