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국민들은 새 국무총리가 임명될 때 마다 “대독 총리” “의전 총리” “받아쓰기 총리”를 벗어나야 한다며 “책임 총리” 역할을 요구한다. 그러나 대통령 중심제에서 총리가 “책임 총리”를 내세우며 소신껏 대통령에 맞서게 되면 해임되고 만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이회창 총리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대통령과 대척점에 섰다가 행정부에 내분을 야기, 해임되고 말았다.

그와는 반대로 지난날 대부분의 총리들처럼 자리를 지키기 위해 대통령의 말씀을 대독하며 부연(敷衍)하는 데 머문다면, “받아쓰기 총리”로 전락된다. 여기에 총리 역할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요구된다.

헌법 86조 2항에 의하면 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命)을 받아 행정부를 통할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94조는 총리에게 장관의 제청권을 주고 있으나 최종 임명권자는 대통령이다.

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는 위치이지 대통령과 각을 세우라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헌법 조문에도 없는 “책임 총리”라는 용어를 만들어 ‘제왕적 대통령‘ 권한을 분산시키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총리가 ”책임 총리“한다며 대통령을 ’보좌’ 역할을 넘어 대통령과 엇갈리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대한민국에는 대통령이 둘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총리가 “대독 총리”로 머물러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총리는 “책임 총리”와 “대독 총리”의 역할을 명확히 분별,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 우선 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함에 있어서 ‘보좌’의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내각을 통할할 땐 “책임 총리”로 적극 나서야 한다. 장관들을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통령 중심제의 역사가 가장 길고 가장 발달한 미국의 경우 부통령 이라는 직제가 있다. 모든 행정부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는 터이므로 부통령은 대부분 한국의 총리처럼 의전 역할로 맴돈다. 부통령을 지낸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역할에 크게 실망한 경우가 많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밑에서 부통령을 맡았던 해리 트루먼은 “부통령은 오줌통만도 못한 자리”라고 토로했다. 한국의 총리도 “오줌통” 보다 나을 게 없다.

미국의 부통령은 대통령 선거 때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동반출마자)로 국민의 선택을 받는다. 국민의 다수 지지표를 얻은 부통령도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오줌통만도 못한 자리”다. 하물며 투표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한국 총리 자리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나라와 같이 2원집정부제가 아닌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총리에게 큰 기대를 걸 수 없다. 2원집정부제에서는 대통령이 외치(外治)를 맡고 총리는 내치를 책임진다. 그러나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국정을 칙임진다. 그런데도 일부 국민들은 우리 헌법에도 없는 “책임 총리”를 들이대며 총리에게 대통령에 맞먹는 권한 행사를 주문해 이회창처럼 대통령과 맞서게 한다. 대통령과 총리의 갈등은 국정에 내분만 조장한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바람직한 총리 역할은 대통령에게는 “보좌” 총리로 그리고 내각을 관리하는데서는 “책임 총리”로 임하는 데 있다. 대통령과 각을 세워서는 안 된다. 내각에 실책이 발생할 경우 책임질 줄 아는 총리가 되어야 한다. “대독 총리”로 대통령 말씀이나 받아써서는 아니 된다. 대통령에게 자리를 걸고 직언할 수 있어야 한다. “대독 총리”를 벗어나 당당한 “직언 총리” “관리 총리”로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하면 총리로서 “오줌통만 못하다“는 허물을 벗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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