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낮 12시 30분경, 경기도 파주시의 한 주택가에서 난데없이 무자비한 총성과 함께 비명이 터져나왔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집안에 혈흔이 낭자한 상태였다. 3명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나머지 3명은 중상을 입었다. 불과 몇시간 전만해도 덕담을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던 이 가족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걸까.설날 오전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한모(45·여)씨의 집.민족의 명절 설날을 맞아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한씨네 일가는 아침부터 제사준비로 분주했다. 이날은 5년전 지병으로 사망한 한씨의 남편 기일이기도 했다.제사를 무사히 마치고 난 일가친척들은 한자리에 모여 오붓하게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날 한씨의 집에는 총 12명의 가족이 모였었으나 남자 7명은 오전에 성묘를 떠난 탓에 집에는 한씨와 그의 딸(14)을 포함한 여자들만 남아 있었다.12시 30분경. 그때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며 죽은 한씨 남편의 이복 형 이모(66·남)씨가 거칠게 들이닥쳤다.이미 오전에 이씨로부터 “집에 갈테니 기다리라”는 전화가 한차례 오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이씨의 출현에 한씨를 비롯한 친척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 이씨 형제간에 크고 작은 말다툼이 종종 일어나는 등 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한씨를 비롯한 사람들은 갑작스런 이씨의 등장에 왠지 모르게 불안함을 느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씨 집에 들이닥친 이씨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고, 한씨와 일가 친척들을 일제히 방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들을 겨냥하여 준비해온 엽총을 난사했다.

누가 제지할 겨를도 없이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더구나 집안에는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남아있던 여자들 밖에 없어 이씨를 제지할 마땅한 사람도 없었다.방안에 내몰린 일가 친척들은 갑작스런 이씨의 행동에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피했지만 좁은 방안에서 이씨의 엽총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한씨와 그녀의 딸(13), 둘째 동생의 딸(26)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한 방에 있던 조카 며느리 등 3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이씨의 엽기적 행각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이씨는 엽총을 난사한 직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둘째동생(63)의 집으로 찾아갔다. 다행히도 둘째동생 부부는 집안에 없었다. 인근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이씨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디지 못해 불을 질렀다. 이씨가 저지른 방화로 40여평 규모의 한옥은 전소됐다.

동생네 가족을 살해하고 집을 태운 것으로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이씨는 범행직후 인근 야산으로 올라가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이렇게 새해 첫날 한 조용한 주택가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은 끝이 났다.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던 친척들은 난데없는 가족들의 사고소식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사건을 담당한 경기도 파주 경찰서는 조사결과 참극을 일으킨 원인이 아버지가 물려준 땅이었음을 밝혀냈다. 또 경찰은 장남 이씨가 차남, 삼남과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라는 것도 그간 갈등의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가해자 이씨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문제로 평소 잦은 불만을 토로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의 부친은 91년 사망당시 큰아들인 이씨에게 2,600평, 둘째에게는 이보다 많은 3,000평의 땅을 물려줬다.

이씨는 아버지를 모시고 농사를 지었던 둘째가 맏아들인 자신보다 많은 땅을 상속 받았던 것에 심한 불만을 품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특히 땅값이 올라가자 이씨의 불만은 더욱 높아만갔다. 최근들어 교하, 탄현 등지에는 대규모 공단과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둘째가 유산받은 땅값은 급상승했다.이씨 형제들이 상속받은 땅이 원래부터 지가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자유로에서 3~4㎞ 떨어져 진입도로가 마땅치 않은 탓에 10년 전만해도 평당 10만원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파주신도시와 LG필립스 LCD 등이 개발되면서 지가가 폭등했던 것.땅값이 오르자 둘째동생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3,000평의 땅 중 1,058평을 4억원을 받고 매각했다.

땅값이 올라 동생네가 많은 이득을 챙기자 이씨는 더욱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씨는 틈만나면 동생집을 찾아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왜 마음대로 팔았냐”며 다툼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유산 상속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이씨가 새해 첫날 심기가 편할리 없었다. 그의 원망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씨는 온 일가친척이 모이는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조사결과 이씨는 이날 오전 11시40분께 “지방으로 사냥을 가겠다”며 며칠 전 파주 교하지구대에 보관중이던 자신의 엽총을 출고받아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아버지의 유산을 둘러싸고 펼쳐진 이복 형제들간의 갈등이 급기야 새해 첫날 지울 수 없는 참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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