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31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대통령을 못해 먹겠다”는 막말을 쏟아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3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국민을 경악케 만든 이 막말의 배경은 노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미국방문(2013.5.11.~17) 직후 달려간 5.18기념 행사장에서 일부 대학생이 노 전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에 행한 친미발언을 규탄하며 소란을 피운 데 있었다.

이를 사과키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5.18단체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백악관에서 한 그의 미국 찬사 발언은 “53년 전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 자유와 정의가 항상 승리해온 나라로 대단히 부럽고 정말 좋은 나라다” 등의 친미를 훨씬 뛰어넘는 거의 종미(從美) 수준이었다.

노사모나 친북세력이 크게 반발하고 나설 만했다. 실제로 민노총 등 좌파 진영이 “사람이 변했다”며 연일 공세를 퍼붓고 전국운송노조 화물연대 파업에 이어 전교조가 집단행동을 ‘경고’하는 등 극단적인 행태가 일어났다. 그때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믿고 의지했던 집단이 갑자기 돌아서서 공격하는 상황을 이겨내기 힘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못해 먹겠다는 막말이 나온 것이다.

그럼 11년 후의 지금 박근혜 대통령 심경은 어떠할까? 통치자로 근래 겪은 일들이 모질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다. 지치고 피로함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통령 자리는 결코 행복한 자리가 못됐다. 오죽하면 “측은하다”는 말이 나올 지경일까. 비리를 저질러 판사 앞에 곧 죽어가는 얼굴로 눈물 흘려 선처를 호소하던 사람이 아주 의젓하고 건강하게 다시 의정단상에 앉아 멀쩡한 사람을 ‘인사 청문’ 아닌 ‘인격 피살’한 대목은 더욱 대통령의 억장을 무너뜨려 놓았을 것이다.

당장 경제가 심각한 터에 두 번의 총리후보 낙마로 국정공백이 길어지는 사태를 즐기고 있는 세력들을 향해선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그 가슴을 후볐을 것이다. 경제만이 아니다. 일본은 고노 담화를 무력화 시키는 우경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의 국정 난맥을 틈탄 일본의 교활함에 치가 떨렸을 노릇이다.

정책 현안들이 줄줄이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는 예년 같으면 이미 발표했어야 할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하반기 경제운용 방향이 포함돼 있다. 자영업자들의 경쟁력 강화 등 경제활성화 대책들이 잠을 자고, 부처 간 조율이 필요한 갖가지 제도 개선안이 전혀 진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은 심한 무력감마저 일으키게 했을 것이다. 또한 국정공백 장기화 책임을 정치권과 나누지 못하는 구조 앞엔 박 대통령의 자괴감이 컸을 것이라고 본다.

여권에 대한 성난 민심속에 치러졌던 6.4지방선거에서 막판 ‘박근혜 마케팅’ 읍소로 겨우 완패를 면한 새누리당이 대통령의 절박한 심정을 공유치 못하고 당권 싸움에 매몰돼 있는 꼴은 아예 쳐다보기조차 싫을 것 같다. 이런 저런 대통령 속맘을 누가 다 알겠는가마는 대통령도 한 사람의 인간인 만큼 인지상정의 이치로 한번 짚어본 얘기다.

모든 정치 행위의 궁극가치가 국리민복에 있으면 사심이라고는 있을래야 있어 보이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이 제발 좀 일 할 수 있도록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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